불편한 존재 1
사랑받되 숭배받지 않을 것
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본인의 목표이다.
우린 사랑을 받는다는 느낌이 들면 무조건적인 힘을 발휘한다.
연애가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가장 높은 수단인 것처럼, 누군가 나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봐주고 대화해 준다면, 우린 극도의 자신감과 힘을 발휘한다. 인상이 부드러워질 뿐 아니라 나를 믿어주는 존재가 있다는 걸 알기에 자신감 있는 행동과 말투들로 업무의 성과뿐 아니라, 성적 또한 좋아지는 사례들을 많이 보게 된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여기는 이들은,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고 그 사랑에서도 충분함을 느끼지 못할 때 누군가가 본인을 숭배해주길 바라게는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어느 자리에 가나 항상 존경받는 이가 있기 마련이지만, 그들 모두가 사랑받거나 편하기는 쉽지 않다.
고 이어령 선생의 책에서 접한 일화가 생각이 난다. 고 이어령 선생은 본인을 문제적 인간이라 칭했다.
그는 대학교에서 강의하던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나 좋다는 사람은 많지 않아. 모르는 사람은 좋다고들 하지. 나를 아는 사람들, 동료들, 제자들은 나를 다 어려워했어. 이화여대 강의실에서 강의하면 5~6백 명 좌석이 꽉꽉 차도, 스승의 날 카네이션은 다른 교수에게 주더구먼. 나한테는 안 가져와 허허"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
그는 그래서 외로웠다 말한다. 초대 문화부 장관이자 문화평론가, 이화여대 석좌교수, 여러 신문의 논설위원을 보낸 그는 끊임없이 질문하는 사람이었다. 배곯는 건 참아도 궁금한 건 못 참아내는 그는 그의 글에 영감을 받고 지혜로움을 선망해왔지만 정작 그에게 소소한 일상의 말을 건네며 찾고 싶은 친밀감은 주지 못했던 듯싶다. 하지만 교수의 위치에서 많은 학생들에게 영감을 주고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하는 역할을 해왔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한 역할을 한 것이라 보이지만 누구나 나를 인정해주는 것 그 너머의 사랑을 본능적으로 갈구하기 나름이다.
생각해보면, 학창 시절 인기 있는 친구들을 살펴보면 각기 다른 외모와 성향임에도 불구하고 묘한 공통점이 있었다. 재미있는 친구들이었다. 유머러스함을 살펴보면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사람들의 대화에서 상대가 어떤 말을 들을 때 즐거워할지를 살피는 배려심과 대화의 맥을 정확히 파악할 줄 아는 이해능력, 상대가 어떤 상태인지를 인지하고 그에 맞는 화제로 즐겁게 대화를 이끌어갈 줄 아는 공감능력. 이 모든 능력의 가장 밑바닥에는 안정성이 수반되어있다.
나를 믿어주는 누군가가 있고, 내가 걱정해야 할 것들은 그 크기가 감당할 정도이며, 내 이야기를 상대가 잘 들어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버무려진 탄탄한 베이스가 밑바탕이 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유머러스함은 상대를 비방하고 깎아내리는 저열한 웃음이 아닌, 겸손한 태도로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건강한 유머러스함에 대한 내 생각이다.
이런 친구들을 항상 어느 자리에서나 빛이 난다. 또한 많은 이들이 그와 함께하고 싶어 한다. 한마디로 사랑받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린 그들을 닮고 싶어 하거나 친해지고 싶어 한다. 한마디로 사랑받고 싶어 한다.
비겐 슈타인은 왜 사랑받되 숭배받지 않을 것을 목표로 했을까, 숭배받는 이들을 생각해보자.
숭배와 함께 떼어낼 수 없는 단어가 종교인 것 같다. 숭배의 사전적인 의미를 살펴보면 "우러러 공경함/ 신이 나 부처 따위의 종교적 대상을 우러러 신앙함."이라 명시되어있다.
우러러본다는 의미는 말 그대로 위를 향해 고개를 들든다라는 뜻이다. 위를 본다는 건 같이 대화할 수 없음을 뜻 하는 건 아닐까, 상대를 우러러본다는 건 감히 그의 말을 가로막거나 그의 말에 허점이 있다 여기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말 그대로 숭배한다 함은 맹목적인 믿음과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실 맹목적이라는 말은 본인의 주관이나 원칙 없이 무조건적인 것 아닌가! 덮어놓고 그 사람을 믿고 숭배한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행동이다.
사람은 늘 실수를 하고 완벽할 수 없는 것일 진데 누구나 모두 옳은 일은 할 수 없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신이 아닌 사람으로서 숭배를 받는다고 하면 어떤 상황이 생길까?
자신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될 것이다. 본인은 그르침이 없다 여겨 조심성 없이 가볍게 행동하고 오만한 말과 행동을 하게 될 확률이 높다. 높은 위치에 오를수록 주변에 책사분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말한다. 본인의 지위가 위로 올라갈수록 많은 것을 보아야하기에 사사로운 것들에 집중하기렵다.
모든 이들의 말을 다 들을 수없고 귀 기울이기가 어려우니 주변인들의 말을 통해 유추할 수 있게 되는데,
그 대상을 숭배하는 이들이 주변에 있다면 그들은 그 대상에게 어떤 말을 해 줄 수 있을까?
무조건적인 믿음으로 대상의 생각과 행동들의 불합리함을 보지 못하게 된다.
말 그대로 편향된 사고가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얼핏 보면 숭배하다는 의미는 고귀하고 신성하게 보이는 단어지만, 숭배받는 이들은 대부분 주변의 환경들로 인해 전체를 보지 못하고 본인의 생각에 대한 강한 믿음으로 굉장히 편협한 사고에 갇히고 자연스레 다양한 의견을 만날 기회가 제한적이게 된다. 모두가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그런 환경에 많이 노출되게 된다.
앞서 말한 사랑받는 이들의 경우엔 상대의 배려라는 덕목이 가장 중요한 핵심 요소로 보이며, 서로 간의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 그렇기에 그들은 어떤 상대냐에 따라 다르게 말하고 공감하며 다른 방법으로 대화한다.
하지만 숭배받는 이들의 경우에는 상대의 배려를 크게 할 필요가 없어진다. 어떠한 말과 행동을 해도 다 믿어주고 우러러 봐주기에 상대에 대한 공감 기능이 쇠퇴되는 것이다. 점차 일방적인 소통이 되는 것이다.
결국 사랑과 숭배라는 단어로 포장되긴 했지만, 결국 소통에 대한 문제로 귀결된다.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대상인가, 소통할 수 없는 대상인가에 대한 문제이고 불편한 존재로 남는가로 기준이 되곤 한다.
아마도 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소통하는 존재로 남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점이 생긴다.
누군가에게 숭배받는 이들은 그 무조건적인 믿음을 어떻게 주게 된 것일까!
그들의 숭배는 최조의 상대에 대한 공감을 통해 이루어진 믿음은 아녔을까?
불편한 존재로 여겨지는 그 대상이 되는 과정 속에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게 있지는 않을까?
그들은 숭배받기 이전에 사랑받는 존재는 아녔을까, 우리가 불편한 그들은 처음부터 불편 한 존재였을까?
때론 우리가 불편하게 여겨지는 것들은 피하고 회피해야 하는 것들이 아닌,
탐구의 대상이자 또 다른 질문들을 통해 새로운 사고가 거듭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