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한 집사의 일기
부지런한 집사의 일기
가족이 된 지도 어연 1년이 다 되어간다. 팔뚝보다 작은 크기로 온 가족의 심장을 앗아간 아기. 21세기의 22년째에, 2월달에, 2일에 처음 만난 새 가족이다. 이제는 사람 나이로 3살 정도의 지능을 의심할 만큼 영리한 성체로 자랐다. 이름은 ‘신 뭉’. 성은 신, 이름은 외자로 뭉. 신뭉은 말티푸다. 말티즈와 푸들이 만나 환상의 케미를 빚었다.
신뭉의 동거인이자, 보호자이자, 집사로 살아가고 있다. 본인을 수식해보는 3가지 표현 중에는 집사가 가장 마음에 든다. 생애 최초로 인간이 아닌 동물을 ‘모시고’ 가정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뱃속에서 품지도 않고 출산하지도 않은 비혈연 관계이지만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하겠다는 다짐으로 가족으로 모셨다.
아무튼 처음 보자마자 신뭉을 사랑하기로 작정한 우리 집사팀은 매일 평온과 시끌벅적한 공기가 롤러코스터처럼 공존하는 생활을 꾸리고 있다. 순간순간 지루할 틈이 없다. 평생 신경쓰지 않아도 될 많은 것들을, 이제는 밤낮으로 신경세포가 “중요하다”라며 알람을 보낸다. ‘산책’ 카드, ‘간식’ 카드, ‘놀이’ 카드, ‘식사’ 카드, ‘미용’ 카드가 돌아가면서 두뇌와 심장을 아찔하게 자극한다. 즐거움과 예측 불가능함으로 매번 벌렁거리는 심장이 이제는 튼튼해졌다. “Ready, Set, go”라는 플랜카드 하나쯤은 마음에 품고 있어야 웬만한 일상을 순탄하게 지낼 수 있다.
DPR LIVE의 노래 중 ‘Jasmine’이라는 곡이 있다. 감미롭게, 부드럽게 사랑을 노래한다. 이 노래를 재미삼아 나의 부지런한 집사 생활에 맞추어 가사 일부를 바꿔보고 싶다.
[DPR LIVE 버전]
“좋은 차 많은 돈 없을 수 있어 하지만 난 널 아낄 수 있고 또 소중히 다룰 수 있어/ 그리고 네가 원하면 우주선을 타 밤하늘 건너 별을 따 너의 손에 쥐여줄 수 있어/ 말만 해 뭐든지 뭐 어때/ 비 오는 날 커피 okay / 신사 홍대입구 okay / 아침에 no make up/ it’s okay it’s okay”
[부지런한 집사 버전]
“좋은 차 많은 돈 없을 수 있어 하지만 난 널 먹일 수 있고 또 소중히 안을 수 있어/ 그리고 네가 원하면 지하철을 타 한강을 건너 간식 사 너의 입에 먹여줄 수 있어/ 말만 해 뭐든지 뭐 어때 / 눈 오는 날 산책 okay / 풀밭 한강 okay / 아침에 특별간식 / it‘s okay it’s okay”
이렇게 쓰고 보니 아무튼 사랑하는 마음은 사람에게나 반려견에게나 비교할 수 없는 비슷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부지런하게 사랑하기 위해서는 부지런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비 오늘 날 커피도 오케이, 눈 오는 날 산책도 오케이, 신사 홍대입구 오케이, 풀밭 한강 오케이는 본질상 사랑하는 대상을 위한 행동이라는 점에서 동일선상에 있다.
부지런한 사랑을 위해 부지런한 사람으로 변화한 몇 가지 요소를 나누고 싶다.
1. 너와 나를 모두 지키는 사람으로
그녀를 모시고 산책을 해야하는 날은 365일이다. 물론 세상이 쓰러질 듯 강풍, 폭우, 태풍이 오는 날은 쉬어야겠지만 원칙상 하루도 빠짐없이 산책을 나가야 한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찾아온 겨울은 내게 색다른 의미가 있었다. 과거에는 추운 날에는 그저 집에서 겨울잠을 자거나 이불집을 만들어 대피를 하면 되었다. 하지만 부지런한 집사가 되기로 선택했다면 겨울에도 산책을 나가는 건 의무이행에 꼭 해당하는 일이었다.
‘내 한 몸도 가누기 어려운 겨울인데 어떻게 뭉이까지 데리고 밖에 나갈 수 있을까.’ 심각한 고민이 이어졌다. 내린 결론은 딱 하나. 우선 집사인 내가 추위로부터 강해져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강해질 수 없다면 강한 척하기 위한 장비라도 보완해야 한다.
이 깨달음이 있은 뒤로 파격적인 구매를 반복했다. 먼저, 생전 쓰지도 않던 비니를 내 손으로 샀다. 마치 걸어다니는 골무 또는 엄지손가락처럼 둥근 머리모양을 자랑하고 비니를 눌러쓰고 다닌다. 이제는 내 피부처럼 너무 익숙해서 머리에 눌러쓰지 않으면 귀와 이마가 허전하다. 이 비니를 장만한 덕분에 머리만 보호해도 강추위로 겪는 심각한 건강상의 위험을 막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다음으로는 새 신발 장만이다. 운동화 몇 켤레로 번갈아 신기에는 수족냉증의 위력을 잠재울 수 없었다. 아무리 양말을 몇 겹 신는다 해도 운동화 하나로는 산책을 감당하기 역부족이다. 그래서, 털이 한가득 맺힌 겨울 털부츠를 야심차게 사버렸다. 그런데 부츠를 사고나서 스스로 감동하고 감응하게 됐다. 부지런한 산책을 위해 부츠를 산 것뿐인데, 덩달아 내 삶의 질까지 높아진 것이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나는 평소에 스스로를 위한 소비를 많이 하지 않는 타입이기에 이 감상은 소중하다. 털부츠를 신으니 밖에서 삼십분을 지내도 발 안이 온기로 가득차다. ‘오, 이정도면 겨울 버틸만 한데?’
수족냉증으로 겨울에 가장 취약했던 최약체가 이제는 스스로도 뭉이도 함께 지키는 힘이 생겼다. 중무장을 하고 나면 뭉이와 더 긴 시간 산책을 할 수 있다. 보다 다양한 코스로 겨울의 공기를 마시고, 새로운 냄새를 맡는다.
부지런한 산책, 부지런한 사랑을 하기 위해 변화의 불을 지핀 것들이 나와 뭉이의 삶을 아주 조금씩 바꾸고 있다.
2. 더 나은 사랑의 방법을 찾아서
이 글을 쓰는 오늘의 따끈따끈한 소식이다. 뭉이가 다닐 유치원을 알아보기 위해 처음으로 데이케어가 가능한 반려견 센터를 방문했다. 무려 건물 한 채가 모두 강아지를 위한 공간이었다.
뭉이를 데리고 센터에 방문해 상담을 하는동안 플레이룸, 루프탑, 수영장을 돌아보았다. 이곳이 반려견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공간이어도 충분히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플레이룸은 크기에 따라 여러 강아지들이 함께 수업이 가능한 곳도 있고, 1:1 수업으로 훈련을 할 수도 있었다. 강아지를 위한 각종 피트니스와 놀잇감들을 보며 어릴 적 가보았던 태권도장, 체육관의 모습을 떠올렸다. 집-학교만 반복하다 땀흘리고 몸을 움직이는 곳에서 친구들과 있으면 엔돌핀이 춤을 췄던 어린시절이 생각났다. 강아지들이 건강한 즐거움을 느끼기에 충분하겠다고 느꼈다.
루프탑은 건물의 가장 윗층, 야외에 있어 사계절의 변화를 온전히 체감할 수 있다. "가을에는 더 재밌을거 같아요"라는 말이 자연히 튀어나온 이유도, 걷고 뛰기 가장 좋은 계절에 루프탑에서 놀면 더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수영장은 지하에 위치해 있고 프라이빗한 1:1 수업이 가능한 구조였다. 25분간 수영을 하고 보호자가 목욕을 시켜 나오는 코스라니, 꽤 시간과 정성이 많이 드는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이걸 해내는 훌륭한 보호자분들이 계시다니 속으로 경건한 존경심을 품고 그곳을 지나왔다.
뭉이가 루프탑과 플레이룸에서 자유롭게 뛰는 걸 보니 절로 '해방감'이 들었다. 매번 산책을 하면서도 하네스와 리드줄에 묶여있어 뭉이는 답답함을 느껴왔다. 아무리 자유롭게 풀어주고 싶어도 지역사회 이웃을 위해, 또 모두의 안전을 위해 자유를 택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곳 데이케어 센터에서만큼은 요란한 주의없이도, “가지마” “먹지마”라는 단호한 지시없이도 뭉이가 자유롭게 뛰놀 수 있다. 뭉이를 품에서 내려놓고 나니 물 만난 물고기 저리가라 힘차게, 유쾌 통쾌 상쾌하게 네 발을 부지런히 내달렸다. 그 짧은 순간에 내 마음도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세상에는 부지런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더 나은 대안을 만들어가고 있다. 아마 이곳을 만든 사람도 반려견을 더 부지런하게 사랑하기 위해 첫 발걸음을 뗐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과 문화를 변화시키는 것은 사랑하는 마음이 근원이지 않을까. 일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목적에는 사랑하는 대상의 편안함과 행복을 위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3. 함께하는 부지런하고 민감한, 사랑
부지런한 사랑과 동시에 '민감한 사랑'도 우리네 삶을 이루는 중요한 가치다. 민감한 관찰과 반응도 부지런함과 짝꿍을 이뤄야 한다.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사람의 아기를 키우는 것과 동물의 아기를 기르는 것은 비슷한 원리를 지닌다는 점이다.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생활해야 한다, 발달단계에 맞게 교육하고 보호할 의무가 있다, 사회적 동물이기에 바람직한 행동규칙을 알려줘야 한다는 등의 공통점이 있다. 이 공통점들을 실천하고자 주의깊게 바라보고, 변화를 섬세하게 살펴보며 함께 성장하는 과정이 일어난다.
뭉이는 사람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기에 쉽게 속내를 알아챌 수가 없다. 그래서 민감성을 발휘해야 한다. 민감한 관찰, 민감한 반응으로 부지런히 살펴야한다. 눈으로 뭉이를 보고 귀로 뭉이의 소리를 듣고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최대한 오감각을 발휘한다. 이렇게 오늘의 상태와 컨디션을 체크하고 매일의 과제를 완수한다.
한편으로 우리가 가족으로 지내며 민감성을 발휘하는 동안 동물이라는 틀 안에서 납작하게 보았던 가치들을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뭉이도 사람처럼 부지런하게 사랑하고, 민감하게 관찰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란걸 순간순간 실감한다. 동물은 사람보다 훨씬 '더' 민감한 능력을 잘 발휘하는 존재다.
인간의 속도와 감정만으로는 흉내낼 수도, 따라할 수도 없는 행동을 뭉이는 보여준다. 나의 민감한 관찰이 무색할 만큼 뭉이는 민감한 반응의 선수다. 나의 시선과 0.01초의 움직임 모두를 빠르게 파악하고 반응한다. 침대에서 일어나 방밖으로 나갈 때, 외출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거실에 물을 뜨러 가는 것인지 그 미묘한 차이를 정확하게 캐치한다. 가족들이 현관문에 가까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면 자다가도 빛의 속도로 달려가 날뛰는 뭉이를 보면 그 재빠른 몸짓과 속도에 경이로울 뿐이다.
이 존재를 보며 사랑은 행동을 통해 더 온전해진다는 걸 따뜻하게 알아간다. 부지런하게 사랑하는 날들을 위하여, 오늘도 내일도 우리는 원형의 시간을 함께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