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끝자락에서 연길을 걷다
여행의 마지막 밤은 유난히 더디다. 백두산 천지의 바람이 아직 옷깃 안쪽에 머물러 있고, 해란강을 건너며 스쳐간 윤동주의 고요한 숨결이 가슴속에 맴도는 채, 나는 지금 연길의 거리를 걷는다. 간판마다 익숙한 자음과 모음이 또렷하다. 한글과 한자가 나란히 붙어 있는 이 거리에서, 나는 낯선 도시에서조차 기이하게 편안한 이방인이 된다.
연길은 조선족의 오랜 삶이 뿌리내린 도시다. 정주와 유랑, 기억과 잊힘이 겹겹이 쌓인 풍경이 밤을 따라 번진다. 길가에 들어선 식당들의 간판은 하나같이 붉은색이나 노란색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빛이 강한 도시다. 하지만 그 빛은 과장되지 않는다. 어떤 불빛은 삶의 희미한 여백을, 어떤 불빛은 오래된 기다림을 닮아 있다.
점심은 이 지역의 특색인 냉면이었다. 질긴 듯 부드러운 메밀 면발, 얇게 썬 수육, 시원한 육수 한 숟가락. 시원함은 입 안에 머물다 곧 사라졌지만, 뒤늦게 퍼지는 감정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 냉면은 단순한 한 끼의 음식이 아니라, 이곳 사람들의 기억이 응고된 풍경 같았다. 입안에서 씹히는 면발보다 오래 남는 것은, 오랜 이주와 노동이 깊이 새겨진 흔적이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숙여 국물을 들이켰다. 역사의 단면을 들여다보는 기분으로.
저녁은 양꼬치였다. 불판 위로 지글지글 구워지던 고기의 향이 연기처럼 몸에 스며들었다. ‘정일품 양꼬치’라는 간판 아래, 우리는 익숙한 듯 낯선 식탁을 마주했다. 꼬치를 굽는 숯불 연기 너머, 옆자리의 조선족 아주머니는 중국어와 한국어를 오가며 이야기를 나눴고, 그 목소리에는 삶의 결이 녹아 있었다. 간결하고 낮은 목소리. 고기에서 떨어진 기름이 불꽃을 튕길 때, 그 순간의 온기는 기묘하게 따뜻했다.
강변은 조용했다. 강물은 말이 없었고, 강 위로 반사된 빛만이 파동처럼 흔들렸다. 불빛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잠시 머무는 것이었다. 나는 누구도 앞서지 않고 걸었다. 뒤돌아보면 낮의 풍경이 희미한 그림자처럼 따라왔다. 백두산의 흰 바위, 해란강의 다리, 윤동주 생가의 오래된 마루와 방 안의 책상. 그 모든 것이 이 밤의 배경처럼 펼쳐져 있었다.
밤거리엔 붉은 간판과 하얀 글씨. 사람들은 늦도록 가게 앞을 서성였고, 주차장에는 빽빽이 들어선 자동차들이 낮의 분주함을 그대로 품고 있었다. 문득, 이 도시가 내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떠나는 사람아, 네가 지나간 시간도 나의 일부였노라”고.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다만, 다시 한번 뒷걸음으로 밤을 바라볼 뿐.
여행은 끝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진정한 끝은, 떠나는 순간이 아니라 기억이 사라지는 때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연길의 냉면 한 젓가락, 양꼬치의 온기, 강변의 잔잔한 어둠, 그리고 한글과 한자가 함께 빛나는 이 거리의 불빛. 그것들은 언젠가의 삶이 되어 내 안에 남을 것이다. 잠시 머물렀던 밤이, 오래도록 내게 말을 걸어올지도 모른다.
내일이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익숙한 공항의 바람, 규칙적인 업무, 그리고 빛 없는 새벽의 시간들. 그러나 이 밤, 연길에서의 마지막 걸음은 분명히 내 안의 어느 조용한 곳에, 묵직한 문장 하나로 남아 있을 것이다.
“당신은 분명, 지나간 사람이었지만, 나는 아직 그곳을 걷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