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필 감독.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어제의 너보다 오늘 더 성장했어"
"내가 그래서 암에 걸렸나 봐"
"숫자한테 미안해"
조직의 결정은 사람의 결정이다. 컴퓨터에 문제를 입력했을 때 이렇게 결정하라고 답을 내려주기도 할 테지만, 입력의 주체, 도출된 답의 최종 처리 과정, 결국 사람의 손과 입에서 마무리된다. 사람... 시스템의 부품을 강요당하고 자처하기도 하는 존재, 결과가 좋으면 성과와 공로는 불균등할망정 나눌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한쪽으로 심하게 쏠린다. 나쁜 결과의 조짐이 조직의 이미지와 숫자마저 흔들리게 할 경우, 꼬리를 자른다. 사람이라는 꼬리, 도망치기 위한 묘안을 짠다. 누구에게 책임을 쏟아부어 희생시킬 것인가. 내외부적으로 나쁜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모두가 가담했지만 피해 최소화라는 허울 아래 타깃을 정한다. 어떤 조직은 목숨이 오가기도 한다. 죽거나 죽이거나 스스로 죽게 하거나 서로 죽이게 하거나, 잘라내야 할 부분은 점점 커진다. 제대로 잘리지 않은 채 끌고 가기도 한다. 망각을 기도한다. 모든 문제가 구성원의 죽음으로 끝날 순 없으니까, 서열이 정해진다. 회사의 서열이기도 하고, 가담하는 비중의 서열이기도 하며, 책임감을 느끼는 정도의 서열이기도 하다. 대충 지나가고 잊히면 되겠지... 그런 일도 있겠지만 문제는 희생 없이 지나가지 않는다. 보이지 않을 뿐. 언급되지 않을 뿐.
마시면 생명체가 죽는 물질을 방류했으면서 인명피해가 없길 바라는 것만큼 멍청한 결정도 없다. 설마 죽기야 하겠어, 물 좀 더러워지다 말겠지, 비 좀 더 오면 씻겨 내려가겠지, 자정 작용을 하겠지, 죽은 물고기가 떠다닌다고? 뭐 사람이 직접 떠마시는 물도 아닌데 잠시 그러다 말겠지, 사람들이 병에 걸려? 임산부 체내에서 독성 물질이 발견돼? 삼진그룹은 비 오는 날 공장에서 방류한 폐수가 인근 주민들을 죽일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허용기준치 비교가 의미 없을 정도로 독극물을 쏟아부었다. 독극물은 수도를 타고 주민들의 몸속으로 침투해 피부병, 각혈 등으로 표면화되었다. 이걸 알고 동의서를 받았다. 책임을 면하기 위해서. 회사 직원들은 주민 살인에 동원되었다. 아 좀 그럴 수도 있지 왜 다들 지랄들이야. 술 먹고 소리 지를 정도로 억울하다. 결정한 사람은. 검사 결과서 원본도 폐기하고 돈으로 무마할 정도로 청렴하다. 일을 키운 내부고발자들을 처단하기로 한다. 꼬리라도 잘라야, 회사의 이미지라는 게 다시 회복될 테니까. 그래야 다시 폐수를 방류하고 죽어도 모른 척할 수 있을 테니까.
악마와 피해자의 대결 일리 없다. 시시한 사람들이 침묵하면서 회사 업무를 살인 사건으로 키운다. 이건 위에서 시킨 일이니까. 나는 조직에 속해 있고 위에서 시킨 일은 해야 하며 그래야 나와 가족의 생계가 유지되니까. 그래서 입을 닫는다. 주어진 일을 한다. 침묵한다. 서류를 넘기고 다른 부서에 오더를 전달한다. 실행한다. 우려 섞인 이의를 제기했을 수도 있다. 침묵과 방관으로 사무실의 타자 소리가 한 동네 주민들을 향한 사형선고가 되어간다. 제한된 정보, 일반적인 업무로 둔갑한 일, 조직의 비용이 줄고 줄어든 비용이 개인의 계좌로 입금되는 부조리, 죄책감은 자각하는 자들을 위한 형벌이다. 책임을 느끼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어떤 페널티도 없다. 나 대신 감옥 갈 총알받이만 고르면 된다. 조직 안에서 기계처럼 죄를 짓다가 인생이 저물어갈 즈음에 사람 구실을 할 결론을 내리는 관리자가 생기기도 한다. 내가 대신 죽으면 다른 약자들은 조금 더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 내가 살 날보다 저 사람들이 살 날이 더 많을 테니까. 물론 남은 살 날이 더 나은 세상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렇게라도 내 죄를 죄책감을 덜고 싶으니까. 내가 무덤으로 안고 가면 내가 걱정하는 자들은 조금 더 버틸 수 있을 테니까. 멍청해서 잔인한 임원과 이를 노리는 세력의 결정으로 심지가 얼마 남지 않은 폭탄을 끌어안기로 한 직원은 이런 유언을 남긴다. "그래서 내가 암에 걸렸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