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 레빈슨 감독. 맬컴과 마리
기억에 기초한 리뷰, 리라이팅(rewriting)은 한계가 명확하다. 분석이 아닌 응축된 지난 관념들의 분사. 텍스트 분량으로 치면 맬컴(존 데이비드 워싱턴)과 마리(젠데이아 콜먼)의 랩배틀 같은 대화 중 1분도 되지 않을 것이다. 둘의 관계 안에 무수한 층위들, 과거들, 당사자조차 인정하고 싶지 않던 심연의 진실들... 늦은 밤, 집에 돌아온 둘, 한 명은 화장실, 한 명은 술을 따른다. 마치 이제부터 이 영화가 끝날 때까지 우리가 늘어놓을 이야기는 똥 아니면 주정이야라고 선언하듯이. 아닐 수도 있다. 맬컴이 목이 터져라 부르짖었듯 진실은 보이는 게 아닌 미스터리 안에 있으니까. 흑백 컬러, 분절된 공간, 한정된 동선, 실종되거나 돌아오는 패턴들, 내가 본 건 영화겠지만 여기 쓰는 게 맬컴과 마리의 전부는 아니다.
당장 맨발로 뛰쳐나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을 극렬한 갈등 속에서 애정에 대한 갈구와 서운함이라는 소재로 다 채울 수 있을까. 의제를 던지고 재해석과 재해석과 재해석을 핑퐁처럼 오가는 대화로 밀도가 높지만 이런 농밀함 만으로 단 둘 밖에 없는 공간에서 2시간의 퍼포먼스를 완성할 수 있을까. 미완이더라도 새로운 여운을 남길 수 있을까. 긴장감은 익숙해졌고 둘의 소재는 바뀐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여자 친구만 빼놓은 맬컴은 충분히 의심스러웠다. 우연은 있겠지만 우연은 우연이 아니다. 무의식이 집약된 결과일 뿐, 마리는 무장을 해제한다.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에 서서 깊은 불안과 분열을 토로한다. 맬컴이 가연성 물질을 들이붓는다. 위로하는 척 재점화에 공을 들인다. 자신을 위한 세련된 변호에 휩싸여 모든 맥락을 설명하기 바쁘다. 화려한 스윙은 공에 맞지 않는다. 마리의 절망은 바닥이 없다. 맬컴의 설명이 길어질수록 마리는 이별의 타이밍을 앞당기기 바쁘다.
맬컴은(또는 감독이 창조한 맬컴은) 인종 프레임과 메타비평이라는 카드를 꺼낸다. 명작들, 명감독들, 하지만 궁금하지 않고 지루한 찬사들이 먼지를 채운다. 흑인 감독이 흑인 주연과 함께 만든 마약 소재 영화는 백인 비평가들의 펜대를 분주하게 만든다. 애프터 파티에서 쏟아졌던 쉴 새 없는 립서비스, 맬컴은 기분이 좋지만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내 장편 데뷔작은 정말 끝내주지만 너희 평론은 정말 지긋지긋해. 내 영화는 영화야, 흑인 영화가 아니라. 난 감독이야, 흑인 감독이 아니라! 아무리 혼자 열을 내도 길들여진 프레임을 흔들기 어렵다. 젊은 예술가는 작품의 디테일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평단이 한심스럽다. 영향력 있는 메이저 매체의 격찬으로 가득한 첫 리뷰도 그에겐 조롱의 대상일 뿐이다. 물론 칭찬을 거부하는 것만큼 중독적인 허세가 또 없긴 하지. 마리가 묻는다. 내 삶을 통째로 도둑질해서 영화를 만들었으면서 배우인 날 캐스팅하지도 않고 소감에서도 제외시킨 건 내가 공동 각본가 자격이 있는 건 아닌지 부메랑처럼 날아올까 봐 그러는 거야? 맬컴은 대응할 대답이 많이 남아있다. 하지만 선택하지 않았다는 결과적인 책임을 지지 않을 수도 없다. 맬컴은 더 많이 아는 자가 할 수 있는 모든 폭격을 동원하며 마리가 고개 숙일 때까지 결박한다. 둘은 시소 위에 있는 듯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지만 주도권은 마리에게 없다.
결말은 처음부터 활짝 열려 있었다. 맬컴과 마리의 간격은 침대 위의 전희부터 갑작스러운 실종까지 극과 극을 오간다. 빛과 어둠을 오가고, 안과 밖을 오가며, 오열과 미소를 오간다. 오갈 뿐 완전히 겹치지 않는다. 늙어 죽을 때까지 이렇게 싸울지 모를 일이지만 둘은 각각 완강한 방어막 안에서 서로를 허용하지 않는다. 분노의 에너지와 육감적 매혹을 탐하길 원하다면 서로는 매력적인 공급원이지만 그 이상은 도달하지 못한다. 모두 알고 있다. 이것이 연인으로서 둘의 한계이자 감독 배우로서의 한계이며 예술가와 관객으로서의 한계라고. 알지만, 알고만 있을 뿐이다. 과거는 바꿀 수 없고 현재는 바뀌기 싫으며 그래서 미래 또한 과거나 현재와 마찬가지일 뿐이다. 주변의 반응으로 변화나 진보를 자각할 수는 있겠지만 가끔은 스스로를 속일 수도 있겠지만 거기까지다. 밤을 지새워도 답은 없다. 둘이 하나(single)가 되면 모를까. 둘의 침실에서 영영 떠나면 모를까. 하지만 칼을 들고 겁박하며 외도를 고백하는 연기 천재의 곁을 어떻게 떠날 수 있겠어. 나의 과거와 언어를 모두 앗아간 천재 감독의 곁을 어떻게 떠날 수 있겠어. 우린 서로를 망하게 하고 죽게 하며 미치게 하겠지. 앞으로도 이렇게 끝없이.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