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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May 11. 2021

모든 감정이 글이 될 필요는 없다

주민현의 시집 <킬트, 그리고 퀼트> 2 차로 읽는 중이다. 1회는 단숨에 읽었고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낄낄거렸다. 뉴스레터로 소설가 김연수가 추천하는 시가 있었고 맘에 들어 곱씹다가 주문한 시집이었다. 6 만에 나온 다케히코 이노우에의 리얼 신간(No.15) 같이 주문해서 기분이 좋았다. 맘에 드는 영화를 본다고 해서 영화를 바로 찍을 수는 없지만 맘에 드는 시나 소설, 문장을 읽으면 바로 글을   있다. 지금  글은 아마도 주민현의 시집을 읽다가 시작된 글일 것이다. 잊고 지내지는 않았지만   없는 언어들이 모호하고 아름다우며 흥미롭게 흩뿌려져 있었다. 해변에 다녀온  옷에 묻어 떨어진 젖고 마른 모래를 손으로 쓸어 모으듯이 읽었다. 어떤 모래알은 반짝거리기도 했고 어떤 모래알은  떨어지지 않았다. 수많은 시인들이  많은 시를 쓰며 각자의 세계에 대해 증언하고 있겠지만 나는  세계로 가는 각각의 문을  열지 못한다. 지금 겨우 문고리를 잡고 있는 것은 주민현의 시집 <킬트, 그리고 퀼트>.


시와 시집에 대해 쓰려고 시작한 글은 아니다. 여러 기분이 부유하거나 고이다가 정수리에서 손톱 끝까지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다 보면 이렇게 글이 되기도 한다. 영화 감상을 며칠 쉬기도 했고 하여 기록도 잠시 멈추게 되었다. 글은 쓰고 싶었고 출발선과 총성이 필요했다. 늘 어떤 동기를 그 자리에 두고 그걸 이유로 글을 쓰기로 했던 것 같다. 쓰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지냈다. 일과 일상 모두가 글과 쓰기가 되었다. 원했고 선택했고 늘 흥분하는 건 아니지만 맘에 든다고 여기는 편이다. 지금은 적어도 이렇게 쓸 정도로. 기억나는 근황을 적는다. 아내와 아이가 있다. 온통 나의 세계는 이 둘로 포화상태다. 나는 지금의 이 세계에서 허우적거리며 황홀감에 흐느낀다. 태초부터 어떤 누구도 경험도 이런 생활의 쾌감을 안겨준 적 없다. 생의 절반이 아내였고 남은 생 전부 역시 아내와 아이다. 상상할 수 없는 언젠가 우리는 우주의 먼지가 되겠지만 그전까지 나는 환상 속에서 눈물 젖은 웃음을 멈추고 싶지 않다. 나는 둘의 손을 잡았다.


관계를 짚어 본다. 인간과 인간들과의 거리. 여러 시도를 통한 시간과 노력의 투자가 늘 공정한 보상으로 돌아올 리 없지만, 어떤 경우는 적당한 어색함, 소리와 색이 없는 공간에 있는 듯한 착각, 정의하기 힘든, 그래서 포기한 시즌, 이런 것들이 차라리 낫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먼 과거의 소란들을 떠올려보면 지금은 이름 모를 휴가지와도 같다. 어딘지 모르지만 뼈와 살은 다치지 않아도 되는. 언젠가 다시 무심함의 대가를 치르게 될까 봐 불안하지만 이 정도 불안은 괜찮다고 하얀 손으로 몸의 어딘가를 쓸어내린다. 문득 잠에서 깨어 작은 손으로 놀란 자신을 달래다가 눈물이 났다는 가사가 떠올랐다. OOHYO(우효로 읽는다는 걸 방금 알았다)의 여러 곡들을 한 달간 꼽고 살았다. 처음 들은 건 Pizza였다. 이후 Youth(Night), Youth(Day), A Good Day도 밤과 낮이 닳도록 들었다. Perhaps Maybe와 Grace 이 두곡을 가장 많이 들었는데 몇 주 전 갑자기 애플 뮤직에서 사라졌다. 서운하다. 우효의 노래들로 모든 교통수단과 걷는 시간과 놀러 간 곳의 공기를 채웠다. 새로 발견한 뮤지션의 곡을 5곡 이상 이렇게 오랫동안 들은 적은 거의 없었다. 이래서 애플 뮤직을 끊을 수 없다. 관계를 쓰려다 음악 이야기로 흘렀다. 둘은 그리 다르지 않다. 현실이 무채색이더라도 괜찮은 음악을 발견하면 아무래도 좋다. 영화와 질감은 다르지만 음악의 힘은 크다. 보이지 않는 부분을 끊임없이 재배열한다,


관계에 대해 좀 더 써보면, 거리감이란 소재에 골몰하는 중이다. 날 오래 지켜본 지인의 증언에 의하면 난 가까운 사람들에게 잘 연락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도 알아서 잘 살겠지. 이렇게 방기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표면적으로 마찬가지다. 부모님에게도 여동생에게도 친구에게도 과거의 동료와 지인에게도 누구에게도. 내 현재에 상대적으로 미진한 영역이 있다면 이 때문일 것이다.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는 부분은 자연 퇴화한다. 5분 거리에서 5년 거리가 된다. 그런데 이 거리감에서 해방감을 느낀다면 다시는 좁히지 못할 것이다. 다리를 무너뜨릴 수는 없지만 조금은 포기하는 쪽으로 몸이 기운다. 마음을 보내고 돌아오지 않는 것들에 대한 기대를 많이 줄였다. 물론 타인의 헌신으로 지탱하는 삶에 대해 아얘 간과할 수 없지만 피로감을 줄이는 게 낫다. 나의 에너지는 오직 아내와 아이를 위해 쓰고 싶다. 이 둘만이 나를 소비하게 두고 싶다. 다시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아무 내용도 없지만 번잡하기만 한. 사실 오전에 읽은 이 몇 줄을 필사하고 싶었을 뿐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테넷이 떠올랐고 탄성을 감추지 못했다. 앞서 이야기한 주민현의 시에서 옮겼다.


네가 신이라면

첫 페이지에 역사와 종교를

다음 페이지에 철학과 과학을 적고

스물네번째 페이지쯤에 음악과 시도 적겠지

그렇다면 나는 눈을 감고 거꾸로 책장을 넘기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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