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과 12월, 그 사이 4월에 대하여
충동과 운명의 룰렛에 모든 운을 맡기지 않으려는 수많은 시도 중 얼마나 성공했을까. 타의가 아니었던 선택이 있기나 했나. 이젠 영화의 그늘 속에서 겨우 찾은 나에 대해 몰래 쓰는 것도 조금은 주저하게 된다. 모두 다른 영화들 속에서 같은 자극 같은 감흥 같은 경험만 채집하고 있었다. 이미지 언어를 활자 언어로 옮기는 일은 사실 가능을 위장한 불가능한 행위, 18년째 하다 보니 자기 전 양치질 같은 습관이 되어버렸다. 4월부터 바뀐 세계에 대해 쓰기 위해 -올해를 결산하는 글쓰기에서 4월을 제외한다면 어떤 시간대에 대한 언급도 동력이 희미해진다- 지금도 이렇게 갈피를 잡는 중이다. 2020년과 12월의 마지막 날들을 보내며 사건들을 정리해본다. 언급할 가치가 있는 사건들에 대해, 모든 등장인물을 무명으로 채우고 모든 장소의 간판을 무명으로 지워가며, 누가 알아볼만한 모든 단서들의 흔적들을 폐허에 매립하고 아무도 모르고 나만 아는 척, 기억에 여전히 남는 것들을 파내어 옮겨본다. 이런 글들을 쓰면 암암리에 팔로잉하던 오프라인의 아는 사람들이 불을 켜고 찾아보던데. 자신이 알던 사건과 자신과 자신의 지인들이 얼마나 엮여 있고 이것들에 대해 내가 무엇을 발설하는지 궁금해서. 지금의 정신상태와 컨디션으로는 어디까지 언급될지 모르겠다. 어디까지 알아듣게 쓸지도 모르겠고. 여기서 기록한 거의 모든 글을 업로드하지만, 이글의 마지막 문단을 맺은 후 어떤 처우를 내릴지 아직 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4월이 기준인가. 그렇다. 적어도 올 4월은 무덤을 다시 파고 너덜거리는 주검에서 흙을 털어내어 바람을 넣고 겨우 사람처럼 보이는 옷을 입힌 후 사슬에 묶어 트럭 뒤에 싣고 좁은 길을 돌아 아주 느린 속도로 돌아올 수 있는 시작점이었다. 이렇게 보니 부활절처럼 다가오기도 하는데, 심정적으로 그리 다르지 않다. 그전까지 셀 수 없이 부정당하고 온몸에 못을 박히며 창으로 찔려 피를 쏟고 피에 젖은 거대한 나무토막을 들고 날 죽이고 싶은 사람들 사이에서 끌려다녔다고, '해석'되니까. 인류의 구원을 위한 사랑을 부르짖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지휘체계를 부정하며 내가 신의 아들이다라고 커뮤니티를 꾸린 것도 아닌데. 들숨과 날숨의 횟수만큼 생각해봤는데, 4월이 오기 전까지 힘들다 말하는 모든 사람들이 힘들었던 만큼 힘들었다. 그래도 죽지는 않아서 이렇게 후기를 남긴다.
2020년 1월은 특별하다. 현재형으로 쓸 만큼 특별하다. 기억 안에 어떤 지위마저 가지고 있다. 떠올릴 때마다 수전 손택이 언급했던 중국 왕족 암살자가 받았던 형벌의 이미지와 칭기즈칸이 적들과 그 백성들을 토벌할 때 행했다는 특정 학살 방식의 이미지가 엉겨 붙는다. 남이 나를 죽인다고 하기엔 내가 너무 처량해 보이니까, 내가 그때 거기에 그냥 나를 두어서 내가 그렇게 되었더라...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내가 다른 액션을 취했다면 파생되는 수많은 연결고리들이 지금 날 다른 곳으로 데려갔겠지. 왕좌의 게임 마지막 시즌에 이런 식의 대사가 나온다. 당신이 겪은 모든 경험이 당신을 지금 이곳으로 이끌었다고. 당신이 여태껏 겪은 판타지적 고난이 지금 이곳에서 당신을 영웅으로 죽게 할 거라는 장엄한 격려와 감사의 의미로 부각되었다. 그런가. 그때의 모든 최선들은 능지처참 같은 대우를 받았지만, 그게 모두 지금의 작고 낮은 평안을 위한 징검다리 뭐 그런 거였나. 그래서 난 겨우 해가 뜨지 않는 골짜기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늪을 지나 겨우 다시 겨우 니콜 키드먼이 아직 이사오지 않은 상태의 도그빌(*라스 폰 트리에)로 들어왔나. 니콜 키드먼의 아버지가 심판하기 전에... 아니 그 정도는 아니니까. 차라리 트루먼쇼라고 하자. 능지처참의 세계에서 트루먼쇼의 세계 온 거라고 말할 수 있다면, 더 이상의 비유나 은유는 필요 없겠지.
'보통'이나 '정상'같은 말들이 비즈니스나 조직생활과 만났을 때 얼마나 원래 의미로 기능하기 어려운지, 잊지 않은 자들은 안다. 내가 만났던 그들이 실제 그들인지 그들의 역할인지, 그들의 역할을 위장한 진짜 그들인지, 내가 투영한 나의 악귀인지, 악몽의 VR 버전인지, 해석에 해석을 더하다 원본은 닳아 없어진 공상인지, 수많은 기억의 레이어를 뒤적거리지만, 믿을 수 없다. 편리에 따라 가장 그럴듯한 사건과 인물들을 편집해서 재생하겠지. 끔찍한 한순간이 어느 시즌 전체를 물들인 게 아니다. 기억에 구체적으로 붙어있지도 않은, 켜켜이 쌓인 암울했던 정서에 대한 감지로 그 시즌은 남아있다. 4월 이전에 무엇을 했는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가 중요해진 게 아닌, 내 생애에 어떤 구멍과 우물을 남겼는지로 모조리 평가된다. 난 여전히 그 깊은 곳을 들여다보며 그때의 내가 온몸을 검게 칠한 채 칠흑 속에 얼굴을 파묻고 부들부들 울고 있던 흔적을 발견한다. 등짝에 볕이 닿는 온기와 대비하며 저 속에 매장하고 온 여러 구의 시신의 신분을 확인한다. 모두 나, 모두 나였다.
죽은 자들을 두고 온 후, 여기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 시작, 시작, 시작의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4월 이전에 여기저기 널렸던 관과 삽과 향냄새의 흔적들을 지운다. 생존 이상의 것들을 고민하는 게 전엔 얼마나 어려웠나. 살갗을 당장이라도 찢을 칼날과 총구에 에워쌓여 얼마나 많은 내 것들 사이에서 남의 생각이라 여겨진 조각들로 남은 퍼즐을 매우려 했나. 여유를 위장했나. 그때 나는 얼마나 내가 아니었나. 모든 겨울이 밤은 아니었지만 그 겨울엔 한 치도 앞을 볼 수 없었다. 내가 말하고 믿는 모든 것들을 스스로 부정하기에 이르면서 자연스럽게 비슷한 표정들과 눈을 맞춰야 했다. 다른 사람들은 내 말을 믿지 못했으니까. 지금은 12월이고 1월과 다르다. 그 사이 4월이 있었고 그래서 12월과 1월이 다를 수 있었다. 그래서 4월은 기적이었나. 아니, 쟁취였다. 지금의 고난이 고난이라면 그때의 고난은 고문이었다. 고난은 어떻게든 개선과 시도의 여지를 남기고 고문은 절뚝거리는 다리와 기능을 상실한 장기, 훼손된 안구와 상실된 뇌조직을 남긴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이런 기록이 완전히 다르지는 않다는 증거이겠지만, 여전히 그 우물에 모든 걸 두고 오지 않았다는 반증이겠지만, 이런 기록으로라도 차이를 남긴다. 이렇게 기록할 정도로 지금은 다르고, 조금은 괜찮아졌다고. 스스로를 덜 동정하게 되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