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버넌트, 복수는 신의 뜻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by 백승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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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사연과 싸운다.

여기까지 오게 된 사연.

아들과 같이 있게 된 사연.

아들과 인종이 다른 사연.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던 사연.

사랑하는 여자가 지금은 곁에 없는 사연.

사랑하는 여자를 잊지 못하게 하는 아들의

목숨을 지켰던 사연.

아들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남자를 죽였던 사연.

아들과 함께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누구라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사연.

생존의 사연은 제각각이다.

원주민에게 잡혔던 사연.

원주민이 머리가죽을 벗겼던 사연.

흐르는 피가 눈을 덮었던 사연.

원주민이라면 치를 떠는 사연.

이 험준한 지형에서 원하는 가죽을 얻고

빨리 도망치고 싶은 사연.

이를 위해선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사연.

어떤 방해도 물리칠 수 있을 듯한 사연.

모두가 굶주리고

모두가 추위에 떨며

모두가 목숨을 걸고 있는 상황에서

모두의 긴장이 극에 달해 있는 상황에서

분노는 오히려 비효율이다.

하지만 한번 사로잡히면 믿게 된다.

분노가 실행으로 옮겨지면

그보다 빠른 일처리는 없을 거라고.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어떤 거짓말도

어떤 살인도 저지를 수 있다고.

그렇게

남의 아들을 죽인다.

극에 달한 분노로 죽인다.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남은 모두를 죽일 수 있는 자의

단 하나뿐인, 세상의 전부인, 모든 중심인,

아들을, 그의 아들을 죽인다.

생각 속으로 수천 번도 더 죽이다가

마침내 실제로 죽인다. 숨을 끊는다.

아들의 아비는 시체와도 같았다.

아들의 죽음 앞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야생의 습격에서 육체는

걸레보다 못하게 갈기갈기 찢어졌고

눈을 뜨고 숨을 쉬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죽지 못해 살아있는 상태였다.

그 무력한 자 앞에서 그의 아들을 죽였다.

살인자는 겁먹는다.

세상의 모든 변명을 다 동원해도 살인이었다.

누적된 분노가 충동과 폭발하며 일어난 사건이었다.

아들을 죽였고, 이는 곧 아비까지 죽인 일이었다.

아들을 죽였고, 어미의 상징을 죽였으며,

이는 곧 아비의 생을 전부 앗아간 일이었다.

산과 물과 하늘 안에서 추격전이 시작된다.

벗어나지 못한다.

그 안에서 상처받고

그 안에서 굶주리며

그 안에서 길을 잃고

그 안에서 서서히 죽어간다.

죽이기 위해 살아남고

살기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죽이기 위해 살기 위해

닥쳐오는 모든 것에게 신세를 진다.

죽은 소의 내장을 뜯고

죽은 말의 몸통 속에 들어가고

산 물고기의 아가미를 물어뜯는다.

과거의 환상들조차 자연을 벗어나지 못한다.

아내와 아이와 죽음과 삶이 공존한다.

산을 품은 물과 물을 품은 대지와

대지를 품은 하늘과 하늘을 품은 바람이

쉼 없이 움직인다.

비슷한 사연을 만난 원주민은 신이었을까.

어떤 대가도 치를 수 없는 남자에게서

어떤 대가로도 되갚을 수 없는

인간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것들 중

가장 격렬한 호흡을 선물한다.

그를 위해 나무를 모으고

그의 상처 위에 약초를 뿌리고

불을 피워 그의 몸을 덮이고

모은 나무로 집을 만들어 그를

추위와 바람으로부터 보호했다.

아내가 보낸 정령이라 여겨질 정도로

이방인은 아들을 잃은 남자를 살린다.

모든 생명의 기운을 다 옮겨준 후

자신은 소리 없이 사라진다. 영영.

아무리 거친 물살과 강풍, 산기슭과 숲을 돌파한다 한들,

자연의 몸통 안에서는 세포의 세포처럼 미미해 보인다.

동이 트고 달이 저물고 물이 흐르고 눈사태가 나는 것들,

어떤 것도 막을 수 없다.

인간은 지들끼리 싸우다 피 흘리며 죽는다.

그리고 할 말이 다 떨어질 때 신의 뜻이라며 책임을 피한다.

죽음에서 돌아와 자신을 죽게 했던 분노의 원흉에게

가장 명징한 복수를 치르려 했지만

되려 적의 말에 눈빛이 동한다.

누굴 죽인다고 이미 죽은 자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다시 인지한다.

신의 뜻에 맡긴다.

분노는 절차를 거쳐 수습되어야 했다.

분노는 수장되어 자연의 일부가 된다.

아내와 아들을 인간에게 모두 잃고

죽음에서 돌아온 남자 또한

처음처럼 지금도 자연의 일부일 뿐이었다

그게 전부였고

삶과 생명이란 게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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