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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Aug 31. 2021

디피, 군대가 여성혐오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김보통 원작. 한준희 감독. 넷플릭스 오리지널. 디피

한국에서 살다 보면 피할 수 없는 일들이 있고 군입대는 그중 하나다. 피할 수 없어서 죽거나 다쳐서 나온다. 살아서 나온 사람들은 할 말이 많아진다. 생존자이기 때문에. 군대 밖 세상에서는 초라한 다음 생존을 이어나가야 하지만, 군대 안에서 죽지 않고 살아서 기어 나왔다는 이유로 말이 많아진다. 참전 용사들 못지않은 불행 배틀은 나이 들어서도 끝나지 않는다. 불행은 훈장이 된다. 생존자들만이 불행을 증언할 수 있다. 아직 겪지 않은 자들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심어줄 수 있다. 어이 김씨 그만 떠들고 이거나 날러. 현실을 제대로 자각하기 전까지 환상 고백은 계속된다. 물론 침묵의 생존자들도 있다. 그들은 입을 여는 순간 과거의 재생 버튼이 눌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입을 다무는 건 인내심이 강해서가 아니다. 과거를 발설하는 순간 자신의 과거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자는 중에 방독면을 씌운 후 숨구멍에 물을 들이붓고, 상급자 앞에서 하의를 모두 내린 후 강제 자위행위를 하고, 상급자의 라이터로 성기에 화상을 입으며 음모가 태워졌던 실화들이 다시 상영되기 때문이다. 타인과의 빈도 높은 대화로 치유되는 상처도 있다고 하지만 군대에서 학대당한 경험은 그런 게 아닌 것 같다. 이 경험이 남은 생애 전부를 잠식하는 걸 막으려면 치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대부분 이런 노력들은 실패한다. 평생 고통받으며 남은 생을 살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 고통이 무의식적으로 보상받기 위해 타인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전가된다는 거다.


외향적으로 남성 여성으로 구성된 사회에서 여성은 물리적으로 남성에 비해 약자에 위치한다. 체구와 근력의 차이가 있고 이 차이는 많은 것을 결정짓는다. 이 타고난 차이가 균형을 맞추고 긍정적 상생을 이루도록 교육되어야 하는데 학교든 가정이든 뿌리 깊은 고정관념과 이를 깨지 못하게 하는 시도들이 남성에게 많은 가시적 혜택과 보장으로 돌아온다. 남자는 강하고 유리하고 여자는 약하고 불리하다는 인식은 살갗에 와닿는 현실이 되어간다. (여성에 비해) 비교적 유리하게 자란 남자들은 군대에서 (최초에 가까운) 처참한 폭력을 겪으며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을 납득하지 않기로 하는 자기 최면의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친다. 내외면적 폭력을 겪으며 당당한 가해자의 지위에 오른다. 자신과 같은 시기를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가해를 저지른다. 이 가해가 자신과 자신의 동기들을 어떻게 죽거나 다치게 했는지를 알면서도 보상의 쾌감에 몸서리치며 흐느낀다. 나도 당했으니까 너희도 좀 알아야 해. 내가 이러는 건 내가 당해서이기도 하지만 교육 차원이기도 해. 너희도 내 위치가 되면 내가 왜 그러는지 알 거야. 나보다 더 심한 개X끼들도 많으니, 차라리 나를 만난 게 다행이야. 나 때는 더 심했어. 여기가 원래 이렇게 굴러가. 나도 여기까지 와 보니 좀 알 거 같기도 하네. 너네들은 이해할 필요도 없어. 그냥 내가 원하는 대로 처맞고 뒤지면 되니까. 2년의 시간과 훈련이 외형의 변화를 얼마나 일으킬까. 비슷비슷한 스무 살이 비슷비슷한 스물두 살이 되어 제대한다. 군복을 벗는다고 뼈와 살에 각인된 경험과 기억이 상실되지 않는다. 너는 때렸고 나는 맞았고 나는 때렸고 너희는 맞을 만했다. 계급과 폭력성이 내재화된다. 버튼이 된다. 보상받고 싶을 때 눌리는 버튼.


전쟁이라는 특수 목적으로 창설된 집단 내부와 바깥 사회의 호흡은 다르다. 입대 전에도 원래 내가 이랬나. 군 생활하면서 바뀐 건가. 내 말과 생각에 다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을 용납하기 힘들다. 그래, 군대와 사회가 다른 건 나도 알지. 아니 근데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정성 들여 설득하려는 데도 나를 반대해? 나를 무시해? 나를 우습게 봐? 내가 지금 얼마나 인내하는지 아나? 아니 나를 얼마나 안다고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지도 모르면서 내 폭넓은 식견을 거부하려고 해? 내가 어디까지 합리적으로 대해줘야 하지? 내가 얼마나 사람답게 대해줘야 날 제대로 대우해 줄까? 아 X발 진짜 뒤지고 싶나. 군대도 안 갔다 왔으면서 뭘 안다고 개X랄들이야. 존X 개념 없네 진짜 처맞아야 정신 차리나 씨X것들 진짜. 한번 산속 아무도 없는 어둠 속에서 X나게 굴러봐야 팔다리 덜덜 떨며 울며불며 살려달려고 매달리려나? 야 X발 진짜 한번 죽여볼까? 버튼이 눌린다. 나보다 나약해 보이는 상대방이 내 의견과 다르다고 생각될 때. 이 버튼은 주먹과 칼이 되어 상대방을 향해 날아온다. 살의를 장착한 채. 그리고 그 상대방의 성별은 여성이다. 억눌린 폭력성을 갖추고 사회에 방출된 어떤 남성들은 이후 스치고 마주하는 여성들을 상대적인 약자로 인지하고 (군 내부에서 누렸던) 자신의 상위 계급성을 내세우려 한다. 그들에게 여성은 하위 계급이 되고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역할극을 이어나간다. 군대에서는 하급자에게 욕하고 때리고 고문하고 거의 죽여도 상관없었다. 그런 곳이었고 나도 당했고 나도 되갚아줬으니까. 하지만 내 상처는 존나 여전히 쓰라리고 아직도 보상받을 게 많다. 근데 사회에서 감히 사회적 약자인 여성 너네들이 날 건드려? 날 무시해? 내가 군대에서 얼마나 뺑이쳤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비싼 커피나 쳐마시던 것들이. 복수의 대상이 옮겨진다. 내무반 선임과 군간부에서 무명의 여성들에게로.


군대는 초중고 같은 교육기관이 아니지만 한 인간과 집단에게 미치는 영향에 있어서 그 이상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수많은 한국 남성이 사회화 이전에 겪는 마지막 (의무) 교육기관의 역할. 김보통 원작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디피는 이 최후의 교육기관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보여준다. 군대를 아는 사람들은 폭력의 세부 묘사가 자신의 경험에 비해 사막의 바늘처럼 여겨지기도 할 것이다. 디피는 영상물이고 내 경험은 전신의 뼈와 근육, 오감과 정신을 옥죄는 실제였으니까. 이 후폭풍이 제대 후 남성이 여성을 대하는 태도에 영향을 미친다고 강하게 믿는 편이다. 여전히 제대하지 못한 채 모든 사람들을 상위 계급과 하위 계급처럼 대하고 있다고. 그리고 보상심리가 발동할 때마다 하위 계급으로 인식한 여성들에게 폭력을 저지르고 있다고. 군대 내부의 폭력은 제대한 생존자들에 의해 군대 밖에서 끝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주로 남성 상급자 VS 남성 하급자였던 구도가 사회에서 남성 상급자 VS 여성 하급자라는 착시적인 인식 구도로 바뀌었고 이로 인해 실제 피해와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주로 남성인 군대 가해자들이 사회의 가해자들이 되어 여성을 해치고 있다. 디피는 이들이 애초 어떻게 가해자들이 되는지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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