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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Oct 17. 2021

마이네임, 복수는 어떻게 이름을 지우는가

김진민 감독. 마이네임

마이네임을 보며 생각나는 영화들을 여기서 언급해야 할까 잠시 고민했다. 그런데 언급하지 않으면 쓸 말이 있기나 할까 싶기도 했다. 마이네임에서 무간도를 빼면 뭐가 남을까. 신세계와 불한당도 이 질문에서 영영 자유로울 수 없다. 마이네임은 두 영화를 한참 지난 후에 나와서 아무래도 다른 현답을 제출해야 했다. 인간수업 감독과 한소희 배우만으로 충분한가. 둘의 화학작용이 각자의 전작들을 상쇄했나. 어떤 기준이든 애써 형성시켜준 기대감을 유의미하게 만들었나. 이 글은 영화 자체에 대한 이야기인가. 스토리와 메시지가 미치는 사회적 영향에 대한 감상인가. 둘 다 인가. 둘 다 아닌가. 4부 분량이면 충분했다 라고, 창작자들이 사전에 1억 번 정도 고민했을 내용을 굳이 꺼낼 필요가 있나. 한국 누아르에서 마이네임이 차별화시키지 못한 만큼 이 텍스트도 애초 차별화되기 힘든 건가. 드라마인데 영화의 호흡을 기준으로 보고 있나.


외로움을 처절하게 견뎌야 했던 10대 윤지우(한소희)에게 유일한 가족 1인의 죽음은 응축된 분노를 폭발시키는 버튼이 되기 충분하다. 킬러의 킬러가 되기 위한 속성 과정을 거친다. 아빠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죄의식이 가장 괴롭다. 원천을 말살하더라도 아빠가 다시 이름을 불러줄 일은 없지만, 내 죄책감을 지우기 위해 당장 스스로 죽지 못할 거라면 다른 누군가를 대신 죽여야 한다. 가담자라는 억겁의 무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아빠를 직접 죽인 자를 내가 직접 죽여야 한다. 분노가 이성적 판단을 압도할 때 10대 소녀는 조폭 합숙 시설에 들어가 보스의 비호 아래 챔피언이 된다. 만화 같나.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도 만화가 시초였다. 남은 시간 동안 이 만화 같은 설정을 간절히 믿고 싶거나 몰입하게 만들면 된다.


복수극엔 다양한 가연성 연료와 장작이 필요하다. 꼬이고 꼬인 피아식별,  개의 이름, 과묵하거나  많거나 뭐든 이게   위한 거다 라는 태도의 남자들, 미스터리 하지만 끝까지 아무 역할도 없었던 NPC 같은 동료, 대안 아빠라도   알았는데 남들이  악마라고 강조하며 부르니까 정말 악마인가 의심하게 하는 설정들(그들은 모두 악마의 심판을 받긴 한다), 일드나 소노 시온 영화에서 익숙하던 진상 캐릭터, 은혜 갚은 까치 같은 결정적인 선행, 알고 보면 우리 모두 불행해 캐릭터들, 포식자와 먹잇감에 대한 어색한 교양 수업, 힐러 스님, (성장을 위한 필요악 이란 명분을 인지하더라도) 진부하고 성의 없는 여혐 코드, 사진으로만 기억되는 의리, 칼부림 후에도 반드시 거쳐야 하는 셀피 의식, 교미  잡아먹히는 사마귀 같은 설정들, 근력의 차이는 급소 가격으로 극복하면 된다는 치트키, 청출어람 등등, 스스로 화려하게 불타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는 이에게도  불길을 옮겨 붙게 하는   중요하다. 내겐   뜨거웠다. 불길은 피할  있을 정도,  그만큼의 타이밍과 기시감이 잦았다.


영화 올드보이는 복수에 대한 집착이 인간을 어떻게 피폐하게 망가뜨리는지에 대한 메시지를 전한다. 마이네임은 세대가 바뀐 들 복수 서사는 당사자를 결코 구원할 수 없다는 점을 증명한다. 복수는 복수 그 자체가 전부일뿐 복수 당사자조차 수혜자 명단에서 지워버린다. 살인을 되갚기 위해 다른 살인을 저질러야 했다는 '다리 힘 풀리는' 깨달음만 남길뿐이다. 개미지옥 같은 상황 속에서 복수를 방해하는 모두를 도륙한 윤지우에게 마이네임은 어떤 이름도 남겨주지 않는다. 윤지우로도 오혜진으로도 살아갈 수 없다. (영화 화이의 화이(여진구)처럼) 모든 지옥을 관통한 후 죽지 못하는 형벌을 받은 자가 되어 홀로 걸어갈 뿐이다. 어느 이름으로도 불러줄 사람도 기억해줄 사람도 남아 있지 않다. 문신을 불로 지지듯, 복수는 결국 자신의 이름을 지우는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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