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로 가득 찬 삶

by 백승권

선택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선택이 결정으로 이어졌나. 결정이 선택으로 이어졌나. 둘 다인가. 랜덤인가. 답을 얻지 못한 질문이 글의 길을 막는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진흙 묻은 신발을 어쩔 줄 몰라한다. 주위는 온통 내 발자국, 방향을 잃은 스키드 마크가 즐비하다. 기억을 만진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안다. 그리고 어디와 누구를 거쳐 왔는지 안다. 앞으로 누구를 만나 어디에 있을지는 모른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안다. 무엇을 해왔는지 안다. 하지만 앞으로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모른다. 더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해온 것들 사이에서 앞으로 계속해야 할 것들을 고르고 새롭게 해야 할 것들을 고른다. 반복하다 보면 놓치게 된다. 해온 것들 사이에서도 놓치는 게 많은 데 새롭게 해야 할 것들을 정하고 다듬고 시작하는 일은 버겁다. 늘 나의 선택과 타인의 결정 사이에서 주춤거린다. 정신없이 흔들린다. 누구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나와 당신 둘 다 최대치로 만족시키고 싶어. 이건 강요다. 반드시 성취해야 하고 성취해야 할. 의지는 늘 준비되어 있다. 문제는 힘이다. 의지를 옮길 힘. 힘이 없으면 의지는 의심받는다. 말 뿐인 인간. 한없이 체크당하고 모조리 들킨다. 아냐. 난 정말 모든 체크 박스를 완전히 채우고 싶어. 웃기고 있다. 신기루처럼 사라지면서 입을 닫지 못하는 모습이란. 문제는 시간인가. 같은 시간대 다른 공간인가. 공간은 의무를 바꾼다. 모든 공간에는 각각의 이행할 의무가 있다. 했나. 하고 있나. 할 수 있나. 의심받는다. 실망시키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 모든 우주가 실망한 채 나와 행성은 블랙홀 속으로 산산조각 난다.


의무는 선택인가. 타의인가. 자의가 타의로 옮겨졌나. 자의든 타의든 수행할 여력이 있나. 의무의 영역은 어디까지였나. 어느새 팽창하고 있었나. 하나를 이행하면 다른 관련 의무가 끊임없이 무한 생산되고 있나. 프로젝트를 선택한 게 아니라 길을 선택한 거였어. 길과 방향을 선택한 이상 밟고 지나가는 모래의 수만큼 이행할 의무의 수도 같아. 다른 길을 선택했어도 마찬가지였겠지. 해내야 하는 데 왜 기운이 없지의 상태와 이걸 어쩌다 왜(!)하게 되었지의 상태는 얼마나 다른가. 후자의 상태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태초의 선택을 부정하는 것은 자기혐오와 옥상의 높이와 한강 수온을 체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의무 실행을 위한 에너지의 고갈로 중간 귀결된다.


하나의 몸통과 단 하나의 뇌에 이렇게 다양하고 세분화된 의무가 칭칭 둘러싸일 줄 몰랐다. 내 팔은 두 개야 열 개의 그릇에 담긴 수프를 흘리지 않고 한 번에 옮길 자신이 없어. 내 다린 두 개야 열 개의 사다리에 동시에 올라탈 수는 없어. 그런데 난, 천 개의 에어백에 둘러싸여 있어. 내가 장착한 장치에서 터져 나온 결과물에 눈코귀를 짓눌리고 있어. 충분히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지금을 몰랐던 이전의 시간엔. 내가 붙인 심지의 불이 용암과 화염이 될 줄 몰랐어. 산과 땅을 뒤덮을 줄 몰랐어. 대피할 곳조차 마련하지 못할 줄 몰랐어. 모든 게 죄가 되었어. 뿌리내린 의무에 휘감겨 흙 속에서 허우적거릴 줄 몰랐어. 의무가 날 파고들어 거대한 나무가 되었으면 좋겠어. 난 거죽과 손발톱, 앙상한 뼈만 남겨도 좋으니 저 높은 곳에 색색 과일이 달려 있으면 좋겠어.


도망치는 걸 바라는 건 아니고. 나의 인생이 다수의 것으로 분해될 때 내가 견딜 수 있는 것들과 견디지 못해 부여잡은 피와 살점에 대해 왜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는지 한번, 자문하고 싶었다. 후회는 없다. 다만 연료는 바닥인데 다음 셀프주유소는 너무 멀어서 이러다 언제 멈추나 두렵고 떨리는 적이 많아서. 논리와 이성으로 조립되지 않는 상태에 대해 확인을 위한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 애초 질문도 답도 상태도 비전도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완전해질 리 없는 상태에 대해서. 누구와 무엇의 탓도 아닌 이 지금을 뭐라고 말할 수 있을지 시도하려 했다. 얼마나 미완의 형태로 잉태될지. 행복이나 희망, 이런 걸 따질 단계는 아니다. 지금은 둘 다 있고, 문제로 정의해야 한다면 어떤 단어와 문장의 형태로 말할 수 있느냐 였다. 정리되지 않는 중간계다. 덜덜거리며 다음 주유소로 걷거나 달리고 있다. 나는 가야 한다. 우리와 함께. 내가 선택한 나의 전부와 함께. 이야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