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요네즈 또는 SRT에서 한 줄로 빠져나가며 든 생각

by 백승권

누추한 일상은 적을 게 없다. 움켜쥐면 사라지는 분말들. 손가락 틈 사이로 빛이 뿜어 나오면 그 빛에 눈이 조금 멀면 그걸 쓴다. 빛의 정체에 대해서. 살갗이 훼손되기 전까진 몰랐던 것들. 늘 반복하면서 몰랐던 이유는 늘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당연하다기보다 알고 싶지 않아서. 매일 겪는 것들에게서 가끔은 부여할 의미가 사라지기도 한다. 당면한 것들은 그저 뚫고 지나갈 뿐이다. 더 이상 묻지고 따지지도 않고 감내할 뿐이다. 부유하는 근사한 말들을 입혀보기도 하지만 남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애초 남의 남의 입에서 나왔을 것이고 남의 남의 남의 사고 경험에서 나왔을 것이다. 어차피 기원과 진실도 파악되지 않을 것들이 분초를 다투는 내 현실에 맞춰질 리 없다. 그냥 대강 그렇다고 치자 여기면 쉽지만 쉬운 건 쉬운대로 대가를 치르고 대가를 치르고 나면 학습하게 된다. 대가를 치르기도 귀찮아서 대가를 치르지 않는 방향을 택하게 된다. 초라하고 누추하더라도 내게서 나온 것들을 적는 일, 망각했거나 새롭지 않더라도 기록하고 싶은 일, 결국 원하는 일. 원하는 걸 적는다. 아까 SRT에서 빠져나오는 줄 서기를 하며 문득 생각이 들었다.


종착역인 수서역에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오면 입석과 좌석의 승객들은 조금씩 들썩거린다. 방송 나오기 전부터 줄을 서는 분들(주로 노인들)도 있고 객실 입구 옆에 앉아 있다가 서서히 일어나는 사람들도 있고 서 있다가 가방을 챙기고 서 있는 방향을 바꾸는 사람들도 있고 어느새 좌석과 좌석 사이 중앙 통로는 긴 줄로 채워진다. 열차가 느려지고 창밖엔 어둠과 낮은 조도의 빛이 번갈아 지나간다. 서서히 멈추고 줄은 더 길어진다. 이때만 해도 객실 입구는 하나의 입구에 둘러싼 인파로 복잡하다. 앞사람과의 좁은 간격, 닿지 않으려는 예민한 움직임들, 백팩으로 미는 자들, 간격이 있어도 바짝 붙어서 앞사람을 툭툭 미는 자들, 열차는 멈추고 문이 열린다. 하나의 문 1인분의 좁은 통로. 그 통로로 가방을 가득 맨 사람들이 낑겨가며 지나가기도 한다. 이제 이 통로를 지나 모두 내려야 한다. 여러 겹으로 서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 한쪽 방향. 승무원의 가이드에 따라 맨 앞사람이 나가고 뒤따라 나간다. 간격이 조금 여유가 생기고 엉거주춤하던 몸짓들에 점점 속도가 붙는다. 입구를 둘러쌌던 N명의 사람들은 1인분의 통로를 통과하기 위해 한 줄이 된다. 물론 그전에 틈으로 새치기를 하는 사람이 없진 않다. 이런 사람들은 어디서나 마찬가지겠지 라는 생각을 잠깐 한다. (당연하게도) 1줄을 서면 1명의 앞사람 뒤에 서게 된다. 뒤통수 목 어깨, 패딩과 가방이 어디 브랜드인지 알게 된다. 마요네즈 같다. 하얗고 점성 있는 내용물이 병 모양대로 아무렇게나 뭉쳐져 있다가 뚜껑이 열리고 힘을 가하면 입구의 모양대로 나오는 길고 하얀 마요네즈.


열차는 높고 플랫폼으로 내리려면 계단을 밟아야 한다. 계단을 밟을 때마다 덜컹 소리가 난다. 안전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왼편에 서 있는 승무원은 승객의 수만큼 덜컹 소리를 들을 것이다. 계단에서 내려오면 다시 개미굴 미로 속에서 지표면 바깥으로 빠져나오는 개미떼처럼 또는 연구실에서 실수로 엎은 실험용 바퀴벌레떼처럼 인파가 흩어진다. 다시 지하철로 향하는 입구로 뚜벅뚜벅 또는 달려서 향한다. 다음 출구로. 거길 나오면 다음 목적지로. 계단으로 상점 사이로. 교통카드를 찍고 삐 소리와 함께 통과해서 지하철로 향하거나 어디론가 향할 번호 적힌 출구로 나아간다. 다들 어디로 가는지, 나는 내 목적지가 입력된 다리가 알아서 움직여서 가긴 가지만. 가니까 가는 거지 다들 무슨 생각으로 가는지는 알 길이 없다. 왜 가야 하는지 자문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 사람 중 몇 명은 내일도 모레도 다음 주도 내년도 새로운 상상 국민의 철도 플랫폼 SRT를 타야 할 것이다. 얼마 전엔 사고가 나서 수백 분 지연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타야 할 것이다. 출퇴근은 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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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먼저 구상 되었으나

다음 글 (아래) 이후에 쓰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