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버닝햄 글 그림 / 최리을 옮김
셜리는 목욕 중이지만 사실은 목욕 중이 아니다. 도망가는 중이다.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으로. 오리배를 타고 하수구를 빠져나오는 중이다. 검은 강물이 흐르는 숲 속에서 나뭇가지를 잡고 살아남는 중이다. 백마 타고 게을러 보이는 어느 기사의 도움으로 달빛도 뚫지 못하는 어둠 속을 빠져나오는 중이다. 셜리의 엄마는 계속 목욕의 중요성과 수건의 위치와 더러운 집안 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셜리는 아랑곳없이 전속력으로 말을 타고 어디론가 달리는 중이다. 셜리의 엄마는 셜리의 치우지 않는 습관에 대해 하소연하고 있지만 셜리는 오리배를 타고 장대 끝에 글로브를 끼운 후 왕국의 운명을 건 결투를 벌이는 중이다. 그 결투에서 상대방을 무참히 물에 첨벙 빠뜨리며 삶 이후의 세계로 보내버리는 중이다. 첨벙... 첨벙...? 셜리와 셜리의 엄마는 마주 보고 있고 물이 다 빠져나간 셜리의 욕조 바닥에는 오리 장난감이 놓여 있다. 아이의 상상은 어른 따위가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다. 말해도 이해하지 못하고 표현해도 해석하지 못한다. 셜리와 셜리 엄마는 같은 집에 있는 듯 보이지만 전혀 다른 세계관 속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특히 욕조 속에서 물을 가득 채우고 노는 목욕은 셜리에게 무한의 스토리텔링을 가능하게 만들어준다. 셜리의 엄마는 일상의 습관으로 구축한 안정된 세계를 딸에게 반복 학습시키고 물려주려 애쓰지만 셜리는 듣지도 않고 바뀌지도 않고 앞으로 나아가려 애쓰지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