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죽음에 대한 생각은 익숙하다. 부모가 살아있고, 살아있는 것을 알고 있는 자녀들에게 벌어지는 일이라고 여기면 그렇다. 생각하는 일은 익숙하지만 막상 그게 실제로 일어난다고 좀 더 깊게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부모의 존재가 당연하다고 여긴 적은 없다. 부모는 나보다 먼저 태어났고 나는 그들의 존재 유무에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내 삶의 과거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나이를 먹을수록 실제적인 영향력은 희미해지고 영향을 받았다는 것에 대한 인지만 늘어가지만 그들이 존재했기에 내가 존재했고, 그들이 선택과 결정을 했기에 내가 지금 생명체로써 지면에 발을 딛고 사고하며 현상들에 반응할 수 있었다. 시작을 결정했고 그것은 점화와도 같다. 램프로 옮겨져 밤길을 밝히든 산과 들로 옮겨 붙어 세상을 태워 먹든 로켓의 분사구에서 뿜어져 나와 우주로 치솟는 발사체의 추진력의 일부가 되든. 그들이 불을 붙여서 나는 지금 타오를 수 있게 되었다. 이 불을 붙인 자들이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내 인생의 불이 단숨에 꺼질 일은 없을 것이다. 내 불은 이미 다른 이들에게 옮겨 붙어 다른 집단을 이루고 다른 시공간으로 퍼지며 다른 가능성을 향해 번지고 있다. 그들의 생명이 걸음을 멈춰도 나와 나의 우리의 다른 방향과 계획은 완전히 전복될 가능성이 낮다. 하지만 그들이 사라진다는 건 원본이 사라지는 일. 가능성이 완전히 없어지는 일이다. 문이 닫히는 일이다.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겠지만 결국 나의 일부가 지워지는 일이다. 나의 일부가 사라지는 일이다. 내가 없어지는 일이다. 그런 일은 결국엔 일어날 것이다. 아직 겪지 않았지만 타인의 경우로 가늠할 수 없는 일이다. 언젠가 일어나겠지만 그 언젠가를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일이다. 수십 년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을 기억한다. 이후 그나마 가까운 친척들은 멀어졌다. 언젠가 부모님이 죽는 날이 오면 어떤 거리가 발생할까. 나와 나의 우리는 어떻게 될까. 어떤 감정과 이야기가 남게 될까. 남은 것들을 미리 세고 있는 것보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뭐가 있을까. 뉴욕타임스 기사(https://www.nytimes.com/2022/03/04/style/modern-love-becoming-a-woman-without-her.html)엔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의 감정과 남은 기억을 기록한 기사가 있고 나는 최근 평생의 농사를 마치신 부모님과 함께 떠날 여행지를 검색하다 이렇게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