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회식=퇴사+MBTI+계란주

by 백승권

느릿느릿 들어갔다. 구석에 앉았다. 가만히 있었다. 귀는 열어두고 눈은 멍하니 고개는 가만히. 먼저 온 사람들이 퇴사자 둘의 이름과 얼굴, 축하 메시지가 프린트된 현수막을 벽에 부착하고 있었다. 불판이 세팅된 자리가 지정석이라고 했다. 없는 테이블은 일반 손님 자리. 이 작은 공간의 95%를 같은 회사 같은 목적의 사람들이 앉아서 먹고 떠들 텐데. 괜찮을까. 한 테이블이라도 더 받고 싶은 주인 심정을 모를 수 없으니까. 마침 비슷한 시기에 도착한 이들과 다시 자리를 잡았다. 한 테이블에 넷에서 여섯. 총 테이블 개수는 여섯 개 정도. 꽉 채웠고 삼십 명 정도 한 공간에 있었다. 두툼한 생삼겹을 담은 쟁반이 왔다. 굽기를 자청한 동료가 집게를 잡았다. 고마웠다. 고기 굽는 테이블에 앉을 때마다 지구를 향해 날아오는 행성을 막기 위해 전 인류를 대신해 핵폭탄을 설치하러 나가고 같이 죽어 사라질 1인으로 떠밀리는 기분인데 먼저 나서 주는 구원자가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었다. 이 모임의 목적은 송별회였다. 이젠 아무데서나 문화라고 부르기도 하는 한국의 회식은 십 년이 넘게 겪는 중이지만 여전히 어색하고 낯설고 어렵고 피곤하고 귀찮기도 하며 집에 가고 싶게 한다. 모든 송별회가 술과 고기와 고성으로 절여진 건 아니지만 이날은 그랬다. 뭐 조직 생활 일부니까 평소 데면데면한 이들과 경험치를 높일 수 있다는 장점도 굳이 찾을 수 있겠지만 술자리와 평일 낮 업무 공간의 텐션이 동일할 수 없다. 자발이든 강요든 자리는 시작되었고 고기는 익고 술을 나누고 대화는 시작되었다. 다행히 나와 같은 테이블에 앉은 이들은 비교적 낮은 긴장감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주는 이들이었다. 우리는 나의 해방일지에서 묘사한 경기도민의 원거리 출퇴근의 애환과 에피소드, IT와 광고업을 중심으로 한 직장 자살 연대기에 대해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그 사이 저 앞에서는 퇴사자들의 인사와 선물 증정, 분위기를 가라앉힌 계란주 러브샷이 있었다. 계란주는 보통의 맥주 유리컵에 날계란 노른자 한 알과 소주를 가득 부은 잔인데 기원은 궁금하지 않고 경험자들 대부분 강제로 마셔봤을 술이었다. 난 술을 안 마시고 거의 모든 술자리에서 입에 대지도 않지만 저 계란주를 마신 적 있었다. 상급자의 명령을 감히 거절하는 괘씸함 대신 그냥 마시는 긴 고통을 선택한 자리였다. 그 계란주가 정확히 동일한 비주얼로 제조되어 저 먼발치 좁고 시끄러운 공간에서 중년의 두 남성이 서로의 팔을 한 바퀴 엮은 후 자기 입에 집어넣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취했을 거 같은 일부 동석자들의 괴성과 박수가 쏟아졌다. 우리 테이블 평균 연령은 30대 초반이었고 저 장면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람이 어떻게 저런 걸 마시지. 딱 이 문장이 떨리는 눈빛과 경직된 표정으로 구현되고 있었다. 고성이 여기저기 튀었고 나는 종종 귀를 막아야 했다. 플라스틱 주걱으로 귓가를 후려치는 것 같았다. 동석자들에겐 폐쇄된 공간의 고음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지는 대화. 끝없는 주변 소음. 일정한 간격의 짠짠짠짠. 자주색 피부들, 풀린 동공, 방향 잃은 고개들, 2시간 정도 지났는데 주변은 22시간 지난 거 같았다. MBTI, 각자가 닮은 셀럽, 담당하고 협업한 업무들, 퇴사자들에 대한 고마움과 공백에 대한 우려, 평소 대화가 적었던 상대에 대해 미쳐 전하지 못한 오랜 고마움들. 테이블 인원이 하나둘 바뀌고 옆 테이블과 농담과 칭찬이 섞였다. 시간을 확인한 후 일어났다. 바깥엔 취한 흡연자들이 모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