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할아버지

존 버닝행 글 그림 / 박상희 옮김

by Glenn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손을 만져본 적 있다. 여자 친구와 전주 국제영화제를 가기로 한 날이었다. 기차가 오기 전 연락을 받았고 도착했을 때 할아버지는 가만히 눈을 감고 누워 계셨다. 불과 일주일 전이 친척들이 모였던 할아버지 생신이었다. 한집에서 평생 모신 큰어머니께서 절을 하며 우셨던 기억이 난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걸 알고 계셨던 것 같다. 누워 있는 할아버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던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가지런히 아랫배에 놓인 할아버지 손등이 보였고 가만히 내 손을 올려보았다. 마르고 주름지고 식지 않은 손. 여러 가지로 복잡했던 어린 시절에 할아버지는 주요 보호자 중 한 분이셨다. 다른 손자보다 가엾고 영특하게 여기셔서 여기저기 자주 데리고 다니셨다. 여름날 할아버지 오토바이 뒤에 타고 어느 행사에 다녀오다가 사고를 당해 둘 다 몇 달 동안 입원한 적도 있었다. 용돈을 자주 주셨고 통장을 개설해주셨다. 매일 시간을 들여 신문을 보셨고 나도 따라서 이것저것 읽게 되었다. 국민학교 때 학교 대표로 웅변대회에 나갔고 1등을 한 자리에도 할아버지는 동행한 보호자로 같이 있었다. 다른 대회를 같이 다녀오다 지나던 중고 책방에서 만화책(신간)을 여러 권 사달라고 했을 때도 조금의 망설임 없이 계산을 하셨다. 자전거 타는 법을 알려주시고 명절엔 필름 카메라로 마당에서 사진을 찍어주셨다. 배를 먹다 새벽에 체했을 때 따주시기도 했고 뜻대로 잘 안 풀렸던 아버지 걱정을 하시기도 했다. 할머니 말에 의하면 아버지는 자매형제 중 가장 사랑받는 자식이었고 나는 손녀 손자 중 가장 사랑받는 아이였다. 할아버지는 말씀이 많은 분은 아니셨지만 알 수 있었다. 어린 날 기억 속에서 할아버지의 비중은 절대적이었고 곧고 엄한 외모에도 내겐 유독 다정했다. 다른 친인척들의 가시적인 질시가 느껴질 정도로. 그런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다가 어느 순간 엉엉 울고 있었다. 찬송가를 부르다가 고개가 떨궈졌고 안경알에 떨어진 눈물이 넘치도록 그치지 못했다. 존 버닝햄이 그리고 쓴 우리 할아버지를 도로시에게 읽어주다가 생각이 났다. 내게도 구체적인 시간들을 함께 보낸 할아버지가 있었다고. 이야기는 손녀와 할아버지의 짧은 대화와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흘러간다. 엉뚱한 질문을 하고 각자의 노래를 부르고 같이 인형놀이를 하고 책을 읽어주고 가끔은 서로 서운한 일도 생기고 같이 바다에 놀러 가고 학교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낚시를 가고 미끄러운 눈길을 같이 걷던 시간들. 그러다 할아버지는 점점 기운이 없어져 행동반경이 좁아지고 실내에서 TV 보는 시간이 늘어나고 그러다가 한 사람만 남는다. 대부분의 손녀와 할아버지 사이처럼. 먼저 태어나신 분이 보통 먼저 자리를 비우게 된다. 애초 알고 있던 가족의 이미지와 나이가 들며 뉴스와 진실로 마주하게 되는 가족의 이미지의 간극은 아득하다. 하지만 믿고 싶은, 실제로 비슷하게 존재했던 이런 사이도 있을 것이다. 아무 거리낌 없이 원하고 아무 저항 없이 들어주는 사이. 너무 어리고 너무 나이 들어서 세상 누구도 제대로 신경 쓰지 않는 두 세대가 서로에게 의지하며 지내는 시기가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먼저 떠나도 그들과 함께 했던 손녀 손자는 잊지 않는다. 기억을 통해 이들의 관계는 영영 재생을 멈추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