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빠진 로맨스, N번째 관계에 대하여

정가영 감독. 연애 빠진 로맨스

by 백승권

연애보다는 연극에 가깝지


혼자 태어나 30년 정도 모르던 사람을 처음 만나 인사하고 밥 먹고 술 먹고 이야기하고 밤이 깊어지고 동의하에 섹스하고 자고 일어나 다음 만남을 기약하거나 거기서 끝나거나. 많은 2030들이 관심과 탐색, 실행과 행위에 몰두하는 이 과정은 현실에서 일어나거나 영화로 옮겨진다. 글을 쓰며 뜸 들이는 이유는 조금 냉정히 자문할 때 타인(들)의 연애(들)에 대해 언급하는 일에 내가 자격이 있냐 해서다. 첫사랑과 결혼해서 며칠 전 첫 데이트 22주년을 지났는데. 누군가 니가 사랑한 사람과 이별하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데 주저하는 감정을, 그 복잡한 내면에 대해 뭘 안다고 쓸 수 있고 그게 납득이나 공감이 가겠냐...... 고 내 안의 누군가가 묻고 있어서. 자격은 없고 몰라서 쓴다. 타인의 연애는 타인의 삶이자 이야기이고 관심은 있지만 경험은 없고 하지만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연애 빠진 로맨스에 나오는 타인의 연애에 대한 관람 후기도 자격 없고 몰라서 쓴다.


몰라서 쓰기로 했으니까 풀어놓는 오랜 생각인데,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그게 그러니까 태초든 최초든 누군갈 만난 사람들 중 다수는 처음의 상대와 헤어지고 다른 사람을 만나 비슷한 과정을 지나 일정한 지점을 거치고 오랜 시간을 보내거나 크고 작은 이유로 떨어지지 않거나 아님 다시 헤어져 다른 사람을 만나는 걸 반복한다는 건데.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사람을 만난다면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만난 이들에 대한 기억과 경험과 가정이 남아있는 채로 학습되고 일부 습관이 형성된 채로 만나는 건데. 이게 육체와 정신에 남아있는 상태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 공동의 감정과 경험을 새롭게 만든다는 게 너무 어렵게만 느껴진다. 불완전한 사람들끼리 만나 불완전한 감정과 경험을 나누며 불완전한 시간을 보낸다는 안전한 답이 있긴 하지만. 말과 글이 쉽지, 같은 시공간에서 호흡과 체온을 나누며 공존을 꾀하는 게, 수많은 대화와 스킨십으로 서로를 확인하는 현실 속에서 너무... 번민에 휩싸이진 않을까 싶은 거다.


잘 모르는 사람과 만나 술과 분위기에 취해 풀린 눈으로 솔직해진다는 거, 그래 그럴 수 있지. 다경험자라면, 의도하거나 예상할 수도 있고 충분히 새로운 자신의 내면과 더 알고 싶은 상대의 외면에 대해 궁금해질 수도 있고. 각자의 경험은 각자의 이론을 만들고 각자의 편향된 중력에 휩싸이게 만든다. 자영(전종서)에게는 다시 버림받을 거라는 떨칠 수 없는 불안감이 있고 우리(손석구)에게는 업무상 기획된 관계라는 죄책감이 있다. 감추고 만나고 가까워지고 맛있는 걸 같이 먹고 살과 혀를 부비는 일은 짜릿할 수도 있겠지. 들키지 전까지는. 정점에서 내려오지 않을 것처럼 넋 놓고 즐거워하며 진행된 연애는 말하지 못한 부분이 발각되며 단숨에 폭발한다. 사랑인 줄 알았는데 사기였지. 완전 공개된 기울어진 리얼리티 연애, 한쪽은 판을 짜고 한쪽은 이용당했다. 여자는 다시 버림받을 줄 알았다는 불안감의 실현을 겪고 무너지고 남자는 출판 조직을 나와 편의점에서 원하지 않는 돈벌이를 시작한다. 고난은 관계가 중장기로 접어들기 위한 테스트이자 수순일 수 있지만, 수많은 후보자들은 여기서 탈락하고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아무나 만나 다시 인사하고 밥 먹고 술 먹고 센 척 약한 척 솔직한 척 이야기하다가 다시 모텔로 향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영화는 일정한 결론에 다다라야 하니까. 자영과 우리는 피를 뽑고 혼술하고 남의 수육을 훔쳐 먹으며 다시 만난다. 헤어져도 괜찮은 연애를 시작한다지만 헤어져도 괜찮은 사람은 없다는 걸 적어도 둘은 안다. 하지만 다시 잊고 다시 시행착오를 시작하게 될 것이다. 현실이 어떻게 되든.


몰라서 쓰는 개인적 견해를 다시 이어가면, 이전 연애에 대한 데이터(경험과 감정)가 (당연히)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상황에서 누군갈 만나는 이런 빈번한 순환들이 내겐 너무 버겁게 여겨진다는 점이다. 오래전 어느 술자리에서 어떤 기혼자 남성이 자신에게 새로운 연애의 감정이 (다른 여성분에게) 피어오른다는 점을 넌지시 밝히며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냐고 여러 사람에 의견을 묻던 중 내가 답변을 해야 할 차례가 온 적이 있다. "음... 현재 아내분에게 솔직히 이 감정과 고민과 개인적인 결정에 대해 밝히시고 동의를 얻은 다음, 이어서 자녀분들에게 솔직히 이 감정과 고민과 개인적인 결정에 대해 밝히시고 동의를 얻은 다음에 새로운 감정의 실행이든 새로운 연애든 시작하면 되지 않을까요."라고 담담하게 의견을 드렸었다. 물론 이 과정도 깨끗하거나 완전무결할 순 없겠지. 새로운 사랑을 위해서는 새로운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보는 편이다. 과거는 사라지는 게 아니니까. 새로운 연애가 몇 번째이든 이전의 연애를 지나고 쌓인 상태에서 이뤄지는 걸 테니. 자신에 대한 불신을 안고 상대를 믿을 수 있을까. 자신의 과거가 상대의 과거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불안이 사랑의 장작이 될 순 있겠지만 사랑의 목적이 불안은 아닐 것이다. 연애 빠진 로맨스는 다시 연극을 시작하는 남녀를 보여준다. 자기 캐릭터의 영역을 정확히 파악하는 자가 더 오래 무대를 지키고 스스로와 상대 캐릭터에게 갈채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나도 몰라서 하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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