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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겟돈 타임, 유대인들은 미국에서 어떻게 살아남는가

제임스 그레이 감독. 아마겟돈 타임

by 백승권

조상은 기준이다. 인간의 역사는 우주의 역사에 비해 너무 짧고 변화의 경사는 너무 가파르기만 했다. 수도 없이 쪼개졌고 살아남기 위해 싸우고 이동하고 죽고 다치고 도망쳤다. 미국으로 건너온 유대인들도 그중 하나였다. 정착이란 얼마나 아득한 개념일까. 그들이 정녕 후손의 안위를 위해 몸부림친 걸까. 현생이 너무 고통스러운데 후손의 삶까지 내다본다는 게 이기적인 인간의 유전자에서 가능한 시나리오인가. 조상들의 사투에도 불구하고 후손들의 삶은 녹록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노예무역을 통해 미국으로 넘어와야 했던 아프리카 계열 흑인이 그렇듯 유대인들의 신분도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조부모-부모-아이들까지 3대를 이었지만 차별과 구분은 여전했다. 비교적 낮은 수준의 교육과 경제적인 면에서 현재 세대는 방법을 간구했으나 쉽지 않았다. 하지만 쉽지 않다고 아이들의 미래를 그냥 방치할 수도 없었다. 아이들이 역사를 기억할까. 역사를 기억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고난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질의 삶을 실현하는 게 더 중요했다.


이런 환경에서 예술가를 꿈꾸는 일은 미친 소리처럼 들렸다. 더 많은 수입을 안정적으로 올리는 직업을 선택해야지. 그런 직업은 있겠지만 그런 직업이 기득권이 아닌 소수 민족에게 주어질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어린 나이부터 꿈을 탈락시키는 일은 얼마나 가혹할까. 처음 등교한 학교에서 사고를 치고 온 날, 아들 폴(뱅크스 레페타)은 아버지 어빙(제임스 스트롱)에게 욕실 구석에 몰려 벨트로 맞았다. 어빙은 몇 해 전 커다란 집을 뚝딱 지어 놀이공간으로 내어줄 정도로 헌신적이었지만 지금은 풀리지 않는 삶을 자식에게 화풀이하는 쓰레기에 불과했다. 폴의 엄마 에스터(앤 해서웨이)는 훈육을 위해 이러한 학대를 유도하고 방치했다. 아들을 사랑한다고 했지만 지금 기준으로 저런 양면적인 면이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 의문이다. 미국으로 건너온 유대인 2세대의 삶은 척박했고 그 스트레스는 다음 세대를 향한 폭언과 폭력으로 이어졌다. 자신들의 고생을 자식들의 성공으로 보상받아야 한다는 조바심이 깊고 강하게 내재되어 있었다. OECD국가 기준 청소년 자살률 세계 1위인 현재의 한국과 얼마나 다른가 생각이 들었다. 부모 세대는 죽지 않기 위해 몸부림쳤고 자식 세대는 스스로 죽기 위해 몸부림치는 현실. 시대적 억압을 운운하는 건 비겁해 보인다. 원인과 이유는 찾을 수 있지만 결과는 온전히 개별적으로 적용된다. 국가 자원의 수치를 낮추는 것을 넘어 한 가족의 노력과 생이 무참히 사라지기 때문이다. 폴도 그렇게 될 수 있었다. 하지만 폴에겐 다행히(?) 할아버지 애런(앤서니 홉킨스)과 친구 죠니(제일린 웹)가 있었다.


애런은 숨을 거두기 직전의 순간까지 자신의 손자를 위해 생의 모든 지혜를 나눴다. 폴은 그의 죽음을 똑바로 직면하며 그가 남긴 올바른 가치들을 새기고 싶어 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낯선 곳의 단짝 친구 죠니는 흑인이었고 죠니의 가정환경은 스스로를 부자 가족의 일원으로 인식하는 폴보다 더 척박했다. 폴이 감옥에 들어갈 위기에 처했을 때 탈출구는 죠니였다. 죠니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더 가난하다는 이유로 주변의 미국 백인 경찰들은 하얀 피부의 폴보다 죠니가 범죄를 설계하고 실행한 주도자라는 점에 더 납득했다. 믿고 싶어 했고 몰고 갔으며 사실상 유도했다. 폴은 자기 대신 죠니를 감옥에 밀어 넣고 생존자가 된다. 미국에 목숨 걸고 건너온 유대인의 후손은 흑인을 대신 희생 시켜 스스로의 현재와 미래를 살렸다. 그렇게 살아남은 아이가 이 영화를 찍었다. 제임스 그레이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 그가 얼마나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없었는지 조금 궁금하다. 아마겟돈 타임은 비겁했던 어린 날에 대한 참회이자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은 현세대에 대한 잔잔한 반성이다. 이제라도 서로 사과를 나눠야 하고 늦게라도 용서를 받아야 할 것이다. 묘비와 감옥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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