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여성의 우월함을 못 견디는 남성에 대하여, 페어플레이

클로이 도몬트 감독. 페어플레이

by 백승권

날 무시하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어


내가 더 낫다는 걸 왜 인정 못 해?


왜 사과를 안 해?



어떤 남성은 이성에 대한 사랑을 정복과 통제의 동의어로 착각한다. 이런 착각은 무의식으로라도 서열을 정한다. 남성인 자신은 위, 상대인 여성은 아래. 처음에 어떻게 사랑에 빠졌는지 정확한 기원을 더듬을 수 없지만 비밀 연애에서 결혼까지 가는 동안 관계의 기울기는 쉼 없이 뒤바뀌고 그러면서 점점 자기 자신과 서로가 어떤 포지션인지 궁극적으로 상대에게 어떤 지위를 원하는지 확신하게 된다. 위급한 순간을 지날 때마다 일정하고도 납득하기 힘든 태도가 반복되어 노출되면 의심은 근심이 되고 단호한 결정으로 이어지게 된다. (흔히 결혼 같은) 되돌리기 힘든 단계를 넘기 전에 그동안의 모든 경험과 감정의 폐기를 감수하고 되돌리게 된다. 이건 상대는 물론 결정 당사자인 자신에게도 무척 힘든 일이다. 영화 페어플레이는 상대적으로 취약한 업무 경쟁력을 지닌 남성이 직장 동료이자 연인인 여성에게 얼마나 치졸하게 구는지 보여준다.


비브라늄이라도 녹일듯한 격정적인 고온 속에서 비밀 사내 연애 중이던 에밀리(피비 디네버)와 루크(올든 에런라이크)의 관계는 에밀리의 승진과 함께 완전히 허물어진다. 루크는 자신보다 빠르게 승진한 에밀리를 끔찍하게 질투한다. 에밀리가 밤낮없이 호출하는 회사 대표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으며 승진한 거라고 강력하게 믿는다. 에밀리는 이런 루크를 달래고 기회를 주기 위해 애쓰며 우선순위로 승진시키기 위해 임원들을 설득하지만, 루크에겐 소용없는 일이었다. 루크는 회사 내부 평가에서 이미 에밀리와 게임이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막대한 손실을 입히는 사례가 누적되고 있었고 알아서 나가주면 고마울 정도였다. 루크는 몰랐고 에밀리는 이제 알게 된 진실이었다.


팀장이 된 에밀리가 기사가 에스코트하는 고급 세단의 뒷좌석에 앉아 출근하는 동안 루크는 늘 그랬듯 덜컹거리는 대중교통에 서서 가며 출근한다. 팀장이 된 에밀리가 막대한 인센티브를 받는 동안 루크는 에밀리와의 약속을 깨버리고 혼자 밥을 먹는다. 팀장이 된 에밀리가 전처럼 사랑해 주기를 갈구하자 루크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거부하고 거부하고 거부한다. 에밀리는 능력이 없는 인간에게 파멸적 모멸감을 안겨주며 해고시키는 서슬 퍼런 조직문화 안에서 자신만의 고유하고도 탁월한 퍼포먼스를 통해 성과를 내고 인정받고 승진한 검증된 능력자였다. 이런 에밀리 입장에서 루크는 그저 사랑으로 모든 것을 커버해 줄 수 있는 연인일 수 없었다.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며 특혜를 달라고 애걸하는 미취학 아동이었고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지도 개선하지도 못하는 한심한 팀원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질투가 빚은 오해에 눈이 멀어 한때 결혼까지 생각했던 연인에게 폭언을 쏟고도 사과할 줄 모르는 양아치이자 수없이 강하게 거부했음에도 (정복 욕구에 미쳐 돌아서) 악력으로 짓누르며 강간을 저지르고 대충 넘어가려 했던 개새끼였다.


에밀리의 가방 속에 리볼버나 베레타가 있었다면 루크의 몸은 이미 너덜너덜한 과녁판이 되었을 것이다. 에밀리는 수없이 구제하려던 루크가 사회적 자멸을 넘어 자신의 커리어와 삶까지 망치려 들자 가만히 있지 않는다. 자신을 폭력으로 제압하려 했던 루크를 향해 날카로운 칼날을 겨눈다. 루크는 마치 자신만의 남성성이 독점한 줄 알았던 폭력과 무력에 의해 반격을 당하자 당황과 울분을 감추지 못한다. 급기야 당장 바지에 오줌이라도 쌀 듯 감정과 육체가 하염없이 무너진다. 루크가 이후에도 목숨이 붙어 있을 수 있다면 아마 자신을 이렇게 만든 에밀리를 평생 원망할 것이다. 그러다 에밀리가 다시 나타나면 숨도 못 쉬며 입을 다물 것이다. 루크 같은 인간이 유별난 캐릭터일까. 아니, 루크 같은 인간은 너무 많다. 페어플레이는 사내연애가 마주칠 수 있는 문제를 극대화한 후 한쪽의 바닥이 드러난 후에도 관계가 지속될 수 있는지에 대한 현실적인 질문을 던진다. 검증된 능력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줄 아는 에밀리는 조직과 커리어 안에서 기꺼이 살아남을 것이다. 루크는 글렀고 망했으며 회생 불가다. 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착각한 탓에 돌이키기 힘든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