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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빼미, 보이지도 않으면서

안태진 감독. 올빼미

by 백승권

계급은 눈을 가린다. 본 것을 부정하게 만든다. 눈으로 직접 본 진실이더라도 늘 외부에 의해 왜곡되고 타인의 해석에 의해 훼손된다. 여기서 외부는 진실이 두려운 자들이다. 진실이 두려운 자들은 진실의 확산을 막는데 사력을 다한다. 진실의 확산을 막기 위해 기꺼이 칼을 꺼낸다. 목격자에게 처자식의 눈을 파내고 혀를 자른다고 겁박한다. 이 정도 위협을 감수하고 진실을 발설하는 자는 많지 않다. 용기는 잃을 게 없거나 적은 자들의 특권이다. 정의는 필요하고 옳으며 기꺼이 존재해야 할 사회의 필수구성요소지만 내 손으로 그걸 이뤄야 할 경우 희생을 감내해야 할 정도는 아니다. 정의는 목숨보다 귀하지 않다. 정의는 목숨보다 급하지 않다. 땅에 고개를 처박고 배를 주리고 눈물을 뿌리며 살더라도 당장은 가족을 보살피고 아슬아슬한 희망을 돌보며 보이지 않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게 낫다. 왕의 아들이 살해당하는 것을 목격했을 때 침봉사 경수(류준열)는 무엇을 떠올렸을까. 경수는 일단 살아야 했다. 눈을 떠도 감아도 보이지 않는 낮, 경수는 밤에 본 진실을 제대로 이야기할 수 없었다. 전하, 소인이 세자가 죽는 것을 보았나이다. 상식적인 상황이라면 경수와 경수의 후손은 평생 공로를 치하받으며 편히 먹고살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왕의 아들을 죽인 자가 왕이라면 다르다. 경수는 목숨을 보존해야 했다. 하지만 본 것은 안 본 것이 될 수 없었고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나지 않았으며 경수는 자신의 가치를 유일하게 알아준 자를 영원히 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었고 어쩌면 목숨을 부지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경수는 자신의 선택과 의지에 상관없이 궁지에 몰릴 운명이었다. 남들보다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이유로 남들보다 불리한 대우를 당하기 위해 선택된 자였다. 침봉사 경수는 세자 살인범이어야 했다. 이것이 경수가 궁궐 공무원으로 선택된 이유였다. 경수가 세자 살인범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자는 경수뿐이 아니었다. 하지만 범인을 경수로 몰지 않을 경우 결과는 떼죽음뿐이었다. 왕(유해진)의 심경은 복잡했지만 아들을 죽이고 수습할 때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왕을 오래 해 먹을 수 있다면 며느리 손자 누구라도 그렇게 처리할 수 있었다. 왕에게 경수는 도구였고 벌레이며 목격자였고 희생 대상이었으며 방해자였다. 귀찮아서 죽여야 했다. 하지만 왕은 쇠약했고 경수에겐 침이 있었다. 왕이 경수의 상처 부위를 직접 움켜쥐고 후벼 팔 정도로 둘의 거리는 가까웠다. 환자와 의사 사이였으니까. 경수는 늘 환자를 귀히 여겼으나 그 환자가 죄 없는 이들을 도륙하고 탐욕과 권력에 미쳐있는 것까지 견딜 수 없었다. 경수는 도망쳤으나 돌아와야 했고 다신 마주하지 않으려 했으나 시대의 부름으로 다시 과거의 적에게 손을 내밀어야 했다. 경수는 이 날을 기다리지 않았지만 운명은 경수에게 사형을 집행할 기회를 안겨줬다. 얼마나 많은 자들이 그저 보이는 것을 보고 그저 들리는 것을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권력자들에게 희생되었을까. 경수의 선택은 기록되지 않았다. 조상들은 기록을 남기지만 후손들은 진실을 알 수 없다. 역사를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을까. 올빼미는 전한다. 시대를 바꾸는 경수 같은 자들은 기록에서 드러나지 않는다고.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건 의심과 추측뿐이다. 세상과 역사는 너무 많이 알려는 자들을 반기지 않는다. 현실도 그렇다. 수백 명의 학생들이 구조받지 못한 채 바다에 가라앉고 수백 명의 생명들이 골목에서 압사당해도 책임자들은 없고 눈물과 분노가 사그라들지 않는다. 우리 중 경수 같은 자들이 존재할 거라는 연약한 믿음이 있다. 본 것과 들은 것을 아무리 부정당해도 결국 심판의 기회에 다다를지도 모른다고. 잊지 않는 이상 일어난 일들은 사라질 수 없다고. 살아남은 자들의 영원한 기억이 되어 끊임없이 먼저 떠난 자들을 위로하고 정당한 책임을 물을 거라고. 낮이든 밤이든 눈을 뜨든 감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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