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했어요

세계시민으로서의 태도

by 백승권
People._Lots_of_them..._(10915927833).jpg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People._Lots_of_them..._(10915927833).jpg




퇴근 중 지하철, 비좁은 틈 사이. 이어폰에선 ‘Why So Serious?(영화 다크 나이트 OST)’가 쿵쾅대고 있었다. 옆에선 키 큰 외국인의 수다, 유창한 회화실력의 한국 친구랑 같이 있으려니 했다. 키 큰 외국인은 신천에서 내렸고, 난 다음 역에서 내릴 차비를 했다. 어디에 있어도 눈에 띌, 거대한 짐 가방. 그 위에 또 하나의 가방. 키만 한 높이 가방 2개 뒤엔 방금 내린 키 큰 여인과 인사하던 외국 여성이 서양인 특유의 밝은 미소를 지으며 서있었다. 누가 지나가던, 누구와 눈이 마주치던 웃고 있었다. 도착 안내 멘트가 흘러나왔고 곧이어 문이 열렸다. 조금 불안했다.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가방을 끌고 내린 외국 여성은 인파를 헤치며 지나갔다. 평소 걸음으로 그녀의 다음 행동을 주시하던 난, 도움이 필요할 상황이 벌어질 것 같아 점점 조마조마해졌다. 멍청했다. 눈치만큼 몸이 빨랐다면 좋았으련만. 이미 20미터 이상 떨어진 외국 여성과 짐은 높은 계단과 마주했다. 겹겹이 주변을 에워싼 인파들. 생각했다. 설마 저렇게 사람이 많은데 누구 한 명은 저 커다란 두 개의 짐을 들고 계단을 오르는 그녀를 돕겠지. 가방 뒤를 잠시 들어주는 수고를 기꺼이 해주겠지. 설마 이방인인데, 설마 저렇게 무거운 짐을 가지고 있는데, 설마 저렇게 높은 계단에서, 설마 혼자 올라 갈리 있겠어.

아차 싶었다. 짧은 시간, 생각들이 어지러이 교차했다. 저 멀리, 그 외국 여자와 커다란 짐 두 개는 저 많은 인파에 묻혀, 휘청휘청 홀로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아무도 눈여겨보지도 손을 내밀지도 않았다. 이를 악물며 어깨와 손목에 힘을 주는 여자의 표정이 언뜻 보였다. 내가 첫 계단을 오를 때 그녀는 이미 절반 이상 오르고 있었고, 내가 1/3 정도 올랐을 무렵, 그녀는 이미 저 위에서 헉헉대며 나가고 있었다. 손에 쥐고 있던 일회용 교통카드도 어떻게 쓸 줄 몰라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어느새 통과해 아주 아주 멀어졌다. 언뜻언뜻 쳐다만 보다 도와주지 못했던 내 양심엔 충격과 안타까움의 멍이 그려졌다. 버스로 갈아타고 집으로 향하는 20여분 가까이 어떤 음악도 없어 심연과 대화했다. 너와 우리, 왜 그냥 보고만 있었냐고.

누군가를 돕기 위해서는 그만한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이 계속 떠올랐다. 아무리 안타까워한들 늦은 일, 지난 일,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사무친 들 다음엔 쏜살같이 달려가서 도울 수 있을까? 번쩍 들어줬을지 언정, 마찬가지로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을. 여자 친구가 자초지종을 듣더니 물었다. 여자가 흑인이었더라도 그렇게 돕고 싶었을까? 아님 우리나라 여자 혹 남자였다면? 아, 판단을 머뭇거린다는 건 이미 글러먹은 일이었다. 여러 선입견을 붙였겠지. 흑인들은 강인한 체력을 지녔으며, 독립심이 강해 보인다는 이유로 몇 발자국 망설이거나 아예 접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국내인이었다면 그냥 지나쳤거나, 코앞이 아닌 이상 쉽사리 팔을 뻗지 않았을 것이고. 결국 서양 여성에 대한 아시아 남자의 별 볼일 없는 오지랖으로 결론지으면 끝나는 건가?

죄의식과 세계시민으로서의 태도 사이를 오가며 번민했다. 얼마 전 몸을 얼어붙게 한 한비야의 뜨거운 말들이 자꾸 떠올랐다.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도움을 주는 건 때와 장소를 막론하고 당연히 이행되어야 할 불문율 같은 건데 난 너무 오래 망설였고, 너무 오래 생각했으며, 결국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물론 누굴 탓할 일도, 깊은 자책에 빠질 거리도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굉장한 후회와 착잡함을 남긴 것만은 분명했다. 그때 좀 더 빨리 다가가야만 했다고. 평생 다시 만날 일 없는 사람이지만, 그렇게라도 같이 가방을 들어줘야 했다고. 아주 오랫동안 남에게 피해만 안 줘도 착하게 산다고 여겼는데, 이만 수정해야겠다. 받은 만큼 줄 수 있는 기회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다음 기회란 건 없지만, 비슷한 운이 남아있다면 좀 더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겠다. ‘그땐, 미안했어요.’

매거진의 이전글이상 징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