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으면 핑계가 줄죠.
실수를 하면 인정하라고 배웠고
인정하지 않으면 사람 취급 못 받는다고 겁박당하고
그렇게 자라다 보니 남의 일방적인 잘못도
내 실수처럼 여겨질 때가 있었고 그걸
억지로 인정하려다 보니 실수인지 잘못인지
그냥 일단은 입을 다무는 게 낫겠구나
싶을 때가 늘어났어요.
잘못된 내 인생의 대부분의 이유를
내 잘못, 내 실수로 인정해야
맘이 편해질 것 같았어요.
지금이야 아무 SNS나 열어도
아이고 너는 소중하다
아이고 너가 세상 제일이다
아이고 자신감을 가져라
아이고 너가 우주 최고니까 다 해 먹어라
이런 소리가 즐비하지만
이미 늦었어요.
뭐라고 하는지 다 비슷해서 들리지도 않고.
잠긴 문은 클립을 아무리 휘어서
집어넣어도 열리지 않아요.
그렇게 자기 잘못으로 가득 찬 세계에
갇힌 인간으로 자라났습니다.
자기혐오는 너무 편리하니까.
뭔가 풀리지 않을 때 자기혐오를 꺼내면
그렇게 명쾌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하라고 배워서
그렇게 해봤더니 역시
어른들 말 잘 듣고 적용하길 잘했지.
세상 모든 잘못된 일에 내 탓 아닌 게 없어요.
매사 당당한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
다른 세계의 즐거운 사람들 곁으로
나는 건너갈 수 없을 것 같고
가까운 사람들 피해 주며 나이만 먹는 삶.
와..... 나 정말 잘 컸구나.
이것 봐 내 안의 괴물이 이렇게 커졌어.
커다랗고 무거워진 몸으로
죽은 아이를 기억 속에 넣어둔 채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가는 인간들에게도
매년 어린이날이라는 게
도둑처럼 찾아옵니다.
과거와 현재, 화석처럼 박혀있는 불행을
미래로까지 그대로 끌고 갈지도 모르죠.
계획하지도 않았고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라서.
다만... (그래 다만... )
지금 곁에 아무도 없더라도
보이지 않는 어딘 가에서
비슷한 울음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사라지지 않는 멍이 비슷한 곳에
새겨진 사람들이 있다는 걸
가해자는 달라도 다친 날들은
비슷한 사람들이 있다는 걸
거울을 마주 보듯 비슷한
어둠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아주 잠시라도 떠올렸으면 좋겠어요.
우리의 지난 어린이날은
모두의 평범한 어린이날과
다른 적도 많았으니까.
아무도 어린이처럼 대해주지 않아서
내가 어린이인지 짐승새끼인지
개념이 없기도 했고.
그러다 정신 차려 보니
어린이의 나이가 저 멀리 지나가고
어린 상처만 화상처럼 지워지지 않는 인간이 되어
늘 어둠 속을 혼자 걷고 있더라고요.
아무리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혼자 걷고 있었고
혼자 걷고 있을 때는 오히려
익숙해서 괜찮기도 했고.
어린이날은
어린이가 되기 전부터
한참이 지난 지금까지
다친 몸으로 혼자 걸어온 이들에게
어린 시절을 잃어버린 이들에게도
위로가 되어야 하는 날이라고.
아직도 타인들의 계산 없는
웃음을 멍하니 바라보며
내가 지은 적 없었던
어린이의 표정을 억지로 지어보는
나이 든 어린이들에게
일 년에 하루 정도, 어린이날은
스스로를 잠시 용서해 줘도 되는
그런 날이어도 되지 않겠냐고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너 잘못이 아니었다고.
너도 그때 어린이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