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랜드로버 패밀리 데이
사물에 감정을 이입하지 않는다. 소중한 시간과 장소에 함께한 물건이 왜 없겠냐만 언젠가부터 원초적 생명을 부여받지 못한 것들과의 교감에 반기를 들었다. 주변 대부분의 것들은 사람의 손에서 시작했을 텐데, 사람 자체가 아니고선 이렇다 할 감정을 느끼는 행위를 '소모'라고 규정지었다. 자동차도 마찬가지였다. 기술과 디자인이 만나 거대한 이동기계라는 면에서 마주하는 순간 압도하는 폭발력을 절감하기도 했지만, '기계'에 강세가 붙는 순간, 열이 식었다. 시동 걸기 전엔 철골구조물, 시동 걸면 푹신한 이동수단. 투박하지만 이렇게 여기곤 했다. 생각해보니 기계(사물)가 나를 포함한 인간의 잠재력과 가치를 넘어서는 것을 억지로 부정하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애써 부인했다. 넌 기계고 난 인간이야. 이러면서.
2012 랜드로버 패밀리 데이에 참여했다. 더 레인지로버, 프리랜더, 레인지로버 이보크, 레인지로버 보그, 레인지로버 스포츠 등 랜드로버가 만든 SUV의 고객들이 모이는 자리였다. 장소는 강원랜드 하이원 리조트. 칼로 오린 듯 정확하게 구획되고 틀에 잡힌, 단조로운 코스가 반복되는 도심에선 실감하기 쉽지 않은, 랜드로버의 첨단 기능과 성능을 깨우기 위한 기회였다. 만발하는 단풍으로 물든 가을의 절경에 흠뻑 젖을 수 있는 랜드로버 고객들만을 위한 멋진 휴가이기도 했다. 난 재규어와 랜드로버의 디지털 마케팅 담당자(copywriter)로서 참여했다. 사전학습을 통해 랜드로버의 수려함과 용맹함은 익히 알고 있었다. 스르르 피어오르는 연모의 감정, 어떤 가격이라도 지불할 수 있을듯한 마력에 들떠 있긴 했다. 하지만 사람도 그렇듯, 사진(이미지)만으로 단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최종 판단은 덥석 올라탄 후에 내려도 늦지 않을 일이었다.
하이원엔 저녁 즈음 도착했다. 역삼동에서 강원랜드까지 프리랜더는 4시간을 달리고도 몸도 안 풀린 듯 보였다. 철인 3종 경기 선수가 포장도로 위에서 드러낼 수 있는 기개가 얼마나 될까? 차가 멈춘 곳의 주변은 온통 천공을 찢을 듯한 산등성이뿐이었다. 랜드로버에겐 맞춤옷이겠지. 아직 다음날 해는 뜨지 않았다. 우린 짐을 풀고 호텔 컨벤션홀에서 저녁과 오리엔테이션을 즐겼다. 컨벤션 홀엔 랜드로버 고객과 가족분들을 위한 테이블이 가득 준비되어 있었다. 묵직하게 네 발을 딛고 세워진 레인지로버 스포츠와 프리랜더, 레인지로버 보그를 뒤로 한채 코스 메뉴로 허기를 덜어냈다. 사막과 밀림에도 끄떡없을 랜드로버의 특장점이 정리된 프레젠테이션과 함께 밤이 깊었다. 내일은 일찍 일어나야 했다.
오프로드 코스 체험은 오전 9시부터 시작되었다. 아침식사를 마친 고객들이 탑승한 랜드로버 차량들이 행사장에 도열했다. 줄을 지어 산으로 향했고, 그때까지만 해도 언덕 좀 오르다 말겠지. 고객행사니까. 정도의 예상이었다. 5분 후 산산조각 난 허무한 착각. 경사는 동네 언덕이 아니었다. 포장은 없었다. 주변엔 나무와 숲과 돌로 이뤄진 산과 계곡과 절벽이었다. 길은 좁고 가파르고 경사가 높았다. 먼지가 자욱해지고, 차 안은 울렁거리고 덜컹거리기를 반복했다. 구비구비 길고 거대한 보아뱀이 휘감고 있는 듯한 코스. 줄 지은 랜드로버들은 이탈 없이 돌파했다. 하늘과 단풍이 겹치는 지점에서는 탄성이 튀어나왔다. 깎아지른 듯한 창밑의 절벽을 지날 때는 두려움도 동승하고 있었다. 중간중간 커피와 쿠키를 즐기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경사를 막론하고 거침없이 흐르는 랜드로버의 성능들에 서서히 매료되기 시작했다. 거인의 손 위에 앉아 암흑의 숲을 지나는 호빗이 된 기분. 전율은 둘러싼 환경의 공포가 아닌 이를 가뿐히 뛰어넘는 랜드로버의 호기에서 움트고 있었다. 평범하고 순박한 기계들을 보며 잃었던, 신뢰가 형성되는 순간이었다.
이제 겨우 오전 일정이 끝났을 뿐이었다. 오후는 오프로드 구조물 체험과 슬로프 등반이 남아 있었다. 점심을 먹고 집결지로 향했다. 차와 커피를 나누며 급격한 상황 변화에 대처하는 랜드로버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을 들었다. 우뚝 솟은 언덕에서도, 흥건한 깊이의 물가에서도 머뭇거리지 않는 랜드로버의 성능과 기능을 선보이는 자리였다. 둘러싸인 고객들 앞에서 코스별 설명이 있었고 테스트 드라이빙이 이어졌다. 운전석 바깥에서만 봐도 오금이 저린 장면들이 이어졌다. 차 안에 있었다면 휘어진 지면과 하늘만 덩그러니 보일 것만 같았다. 랜드로버는 의연했고 묵묵히 장애를 장점으로 바꿔놓았다. 어떤 지형과 구조물이든 랜드로버가 지나가면 랜드로버의 길이 될 뿐이었다. 긴장감이 고조되던 곳곳에서 탄성과 갈채가 쏟아졌다. 직접 타보는 순간 이미 임계점을 넘은 이후였다. 우리가 탄 차량은 레인지로버 스포츠였다. 묵묵하면서도 세련됨을 감추지 못하는 익스테리어와 달리 인테리어 역시 디자인과 정보, 기능과 필요들이 적재적소에 놓여 있었다. 과하지 않으면서도 자기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고, 선과 색들이 안정감과 편안함을 높이고 있었다. 오른쪽 두 바퀴가 완전히 들리며 경사진 곳을 지날 때는 하늘과 지상 사이의 선이 대각선이 되어 앞유리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코스 체험을 마치고 다시 차에 올랐다. 겨울엔 스키장 시설로 쓰이는 정상에 올라 거대한 회전 테이블 위에서 커피와 쿠키를 즐겼다. 꼭대기 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자 빌딩 앞 공간을 메운 랜드로버의 지붕들로 가득했다. 뭐랄까. 스타워즈의 격납고 같은 모습?
올라온 만큼 내려갈 차례였다. 눈앞엔 길이라며 그어진 선이었지만 고층빌딩 사이에서 외줄을 타는 광대가 된 기분이었다. 롤러코스터의 정점을 찍고 내려올 때의 떨림과도 비슷했다. 기우. 브레이크 고장 난 자전거처럼 위험을 담보로 한 질주는 랜드로버의 기호가 아니었다. 느긋하게 속도를 조절하며 운전자와 동승자를 안심시켰다. 브레이크가 아닌 가속페달을 밟는 내리막길이라니. 전자동 지형반응 시스템(Terrain Response)과 내리막길 주행 제어장치(HDC, Hill Descent Control), 브레이크 제어장치(Gradient Release Control)등의 정식 명칭을 언급하지 않아도 안전과 편안을 위한 그들의 민첩과 유연은 두 엄지를 들기에 충분했다. 아이라면 널찍한 아빠 등에 업힌 듯, 어른이라면 검증된 전문가의 손을 꽉 쥐고 가는 기분,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한없이 복잡한 판단과 감각의 기능을 멈추지 않는 인간을 위해 최적화되어 있었다. 운전자가 누구든 운전자가 기대하는, 필요한,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까지 세심하고 단단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운전자가 지켜주고 싶은 이들까지 감싸 안는 것은 물론이었다. 세련된 충직함, 과시하지 않아도 격렬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는 웅대한 퍼포먼스, 그 안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신뢰감. SUV라는 말 안에 담을 수 없는 것들이 이토록 많은지 전엔 알지 못했다. 경험한 적 없어 무지했던 부분까지 채워주는, 기계에게서는 얻지 못했던 정서적 자극과 혜택이었다. 물리적 이동을 넘어 머리와 가슴까지 울리는, 벅참.
그래, 매료되었다. 디자인과 기술력이 응집된 지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그렇게 경험하고 절감한) 이동 공간. 자신의 장점을 말하는 기계들은 많지만, 경험 이후로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타인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허상과 같은 명성에 이끌려 자신의 기호를 맡기거나, 외운듯한 정보를 성령체험이라도 한 것처럼 부르짖는 이들은 많지만 이는 모두 직접 겪은 자의 증언 앞에선 속절없이 무너지며 하나의 제물로 둔갑하기 마련이다. 쉽게 사라지지 않을 텍스트와 이미지가 아닌 오감과 시간을 쏟아부어 획득한 것들, 흔적과 인장으로 남아 몸과 기억의 보이고 보이지 않는 부분에 깊게 새겨지게 된다. 랜드로버는 이것을 가능하다고 믿게 한 브랜드다. 기계에 대한 불신을 지우고, 기계 이상의 탈것, 아니 지상에서 가장 완전한 이동 공간이라는 신뢰를 형성했다. 지독한 불신에서 신앙에 가까운 선망과 열망으로 바뀌는 순간만큼 과거와 현재, 미래의 자신을 적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때가 또 있을까? 어떤 지형과 상황의 변화에도 굴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란 이런 것이다. 무리의 의견에서 파생되는 혼돈을 넘어 자신을 향한 진정한 확신으로 이어지는 순간. 랜드로버가, 이를 가능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