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에센스는 독과 같아요
한 방울이 심연에 떨어지면
그윽하게 피어올라 투명한
모든 영역을 뒤덮은 후
색을 모조리 바꿔놓아요
붉고 검고 푸르게 독은
심연을 물들이고
심연은 독성에 앓게 되죠
내게 확실한 것을
네게 믿게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결의 문제
우리는 우리지만
우리는 뇌와 심장을 튜브를
꽂아 같이 쓰고 있지 않고
우리는 같은 몸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우리는 피부를 스치며 자라지 않아서
심지어 이것은 타자의 설득을 통해
납득이 되어야 하는 물성이 될 수 없어요
온전히 스스로 체화시켜야 하는 영역
서로를 묶고 있는 로프를
똑같은 방식으로 붙잡고 있지는 않더라도
스스로 자르거나 먼저 놓거나
알아서 풀리도록 두면 안 되는 일
마음을 숨기는 법을
자주 연습한 사람에게
자아를 하나 더 생성하는 것은
자연스럽거나 간단해 보이기도 하지만
인간에 대한 무조건적인
한없는 신뢰가 당연한 사람에게는
자아를 하나 더 생성하는 것은
명분부터 실행까지 도대체가 불가능한 일
자아를 하나 더 생성한다고
내가 완전히 분리되나
그저 또 하나의 나라면
서로 다른 두 가지의 내가 아닌
서로 완전히 같은 두 개의
복제품 아닌가
마치 하나의 영토를 공유하며 경계를 두고
각자의 독립권을 지니며 운영되는 국가와 같죠
새로운 자아
새로운 영토 새로운 정신
새로운 관점 새로운 규율 새로운 실험
새로운 관계 새로운 기준 새로운 경험 새로운 시작
처음엔 신규 브랜드
팝업스토어처럼
운영해야 할지도 몰라요
새로운 도구를 몸과 손에 익히듯
새로운 시간과 노력이 축적되어야
새로운 역사를 만들 수 있을 거예요
이렇게 이론과 가설은 떠오르지만
결국 현실과 의지의 융합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지금은 아무도 모르죠
다만 이 보트에서 내리고 싶지 않고
망망대해라도 같이 표류하고 싶어요
저는 아무 준비도 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생의 마지막 퍼즐을 같이 맞출 때까지
최후의 그림을 같이 완성할 때까지
서로를 묶어 연결한 로프를
단단히 잡고 놓지 않을 것입니다
끝은 없어요
모든 순간이 끝이듯
모든 순간이 시작이에요
심연이 어떻게 물들든
돌이킬 수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