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밥 먹은 이야기가 이렇게 장황하다
1. 과거의 혼자
예전의 글들을 모아두었다.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여자와 일에 대한 이야기. 이따금 몇 줄씩 읽는다. 도드라지는 면이 있다면 분위기. 증오와 분노가 서려있었다. 대다수 일에 대한 글이었다. 선택한 일을 위해 선택해야만 했던 직장에서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의 기록들. 힘들어하고 있었다. 지금 읽어도 금세 그때의 정서로 돌아갈 정도로, 사방이 막힌 우물 안에 갇힌 쥐가 되어 발톱이 빠지고 피가 나도록 벽을 긁어도 헤어 나올 수 없고 위에서는 뜨거운 불에 녹인 납을 붓는 상황이었달까. 뜨겁고 시리고, 자아가 열 송이의 꽃으로 이뤄져 있다면 두세 송이는 완전히 시들어 꺾이고 죽어버린 느낌이었다. 시간이 지난다 해도 다시 꽃을 피울 수 없도록. 그런 적이 있었다. 글로 옮기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할 정도로, 글을 통해서 달궈진 증기를 다소 빼낼 수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며 옮겼을까. 들어줘, 도와줘, 살려줘, 꺼내 줘 이런 메시지를 은연중에 함의하고 있었을까? 스스로를 동정하는 게 이토록 무력한 일인 줄 알면서도 이렇게라도 견디자라며 허울뿐인 행위를 반복했던 것일까?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만 그때의 글들은 정말 외로워 보인다. 그 지독한 상황에서도 똑똑한 척 보이고 싶었는지 누구의 탓도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마치 가혹한 환경에 내 일부가 투영되어 있고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을 뿐이며, 관점만 바꾸면 달리 보일까 아님 행동을 개선하면 모든 게 편해질까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괴로워하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지만 그 희망조차 견디기 위한 주입이지 실제 뭔가 달라질 거란 기대는 보이지 않았었다. 지금도 선명한 이미지, 언제까지 이를 감내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끝없는 끝의 반복. 붕괴, 자멸, 다시 증오, 다시 분노. 글 속에서 홀로 분투하고 있었다. 혼자서. 글을 들여다보면 늘 혼자가 보였다.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체념, 한계. 이런 파급이 나비효과였는지 모르지만 이런 파급은 기본 환경적 요소들을 선택할 당시에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런 재앙을 짐작했다면 도저히 선택하지 못했겠지. 어떤 상처는 초연함이 아닌 점점 커지는 두려움만 학습시키니까. 세상에서 나 혼자만의 고통이 아닐 거라 여기면서도 나 혼자만 겪는 고통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을 정도로 정서적으로 고립되고 나약해진 상태. 이런 건 선택할 수 없었다. 고문을 견디는 훈련을 받은 적 없었다. 이렇게 혼자되는 상황이 내게 닥칠 줄 몰랐다. 그랬었다.
그게 절차를 거치며 종결되는 날이 왔었고, 그날 난 혼자 점심을 먹었다. 한 시간 정도 한적한 커피숍에서 지나는 차들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웃음도 울음도 없었다. 멍했다. 멍. 공간이 옮겨지는 사이에 사전 합의한 몇 주를 보냈고, 그 시간 동안 몇 개의 글로 사건과 감정을 재정리하며 과거를 씻어내려는 의식을 치렀다. 이후, 한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섣불리 새로운 환경을 정의 내리지 않았다. 봉합이 채 이뤄지지 않는 상태에서 자의적으로 어떤 대상과 환경을 판단하는 것은 경솔하고 비겁하며 위험했다.
그렇게 2년이 지났다.
2. 현재의 혼자
썰물처럼 사람들이 건물 밖으로 빠져나가는 점심시간. 어쩌다 이번 주 대부분의 점심시간을 혼자 지내게 되었다. 점심을 할애할 정도로 일이 넘치도록 많은 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이 나가는 것을 보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같이 먹는 사람들에겐 굳이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나중에 말하니 그들은 박장대소를 했다.) 그들은 그 시간에 늘 하던 행동을 하러 나갔다. 텅 빈 사무실. 혼자. 기분이 말끔했다. 어떤 날엔 혼자 도보 20분 거리의 공원에 가서 거닐고 오고, 어떤 날엔 혼자 햄버거를 먹으러 갔다. 혼자 이어폰을 끼고 모르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녔고, 혼자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좋아하기도 했다. 스스로 선택한 혼자였다. 스스로 선택한 고립이었다. 스스로 선택한 시간이고 스스로 선택한 공간들이었다. 그게 괜찮았다. 아무렇지도 않고 기분이 좋았다. 자유로움이었다. 조금 쭈뼛거림도 없지 않았지만 연습한 것도 아닌데 당연한 부분이었다. 옆 테이블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혼자 앉을자리를 찾았고, 혼자 가야 할 방향을 정했다. 혼자 메뉴를 고르고 혼자 앉아 혼자 음식을 먹었다. 늘 무리들과 아니면 약속한 누군가와 같이 있어야 될 것 같은 시간이었다. 이번엔 달랐다. 그걸 경험했다. 혼자 선택으로.
그러다 어제는 아내가 집을 나갔다. 외박을 한단다. 멀리서 친구들이 왔고 그들과 숙소를 잡아 음식과 이야기를 나눈단다. 아. 어쩌지. 업무 중 점심시간은 그렇다 치고 이젠 저녁과 밤, 새벽까지 혼자가 되었다. 누구는 올레를 외치라고 했고, 누구(ㅇㄸ)는 나이트를 추천하기도 했다. 외계인 특강을 들으러 벙커에 갈까 했다. 영화를 볼까도 했다 둘 다 하려고도 했다. 어차피 새벽이슬을 맞아도 돌아갈 곳엔 기다리는 이가 없는 데. 영화관으로 정했다. 예매는 한 자리. 퇴근 후 터덜거리며 근처로 향했다. 라디오 출연료가 들어왔고 에이샵에 들러 고심 후 아내 선물을 샀다. 시간이 남았다. 편집매장에 들렀다 나왔다. 시간이 남았다. 마침 듣던 팟캐스트에서 UMC의 직장인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반복해서 듣다가 이때다 싶어 레코드샵에 갔다. 앨범 'LOVE, CURSE, SUICIDE'를 샀다. 시간은 남았고 배가 고팠다. 햄버거는 점심에 이미 (혼자) 먹어 다른 메뉴를 고르려 했지만 인산인해인 코엑스에서 품격 있게 홀로 먹을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차이니즈 레스토랑이라고 쓰여 있는 곳, 굶고 싶지 않아 4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어차피 홀은 비어 있었다. 혼자신가요? 네. 짜장면요. 네? 짜장면 하나요. 뭐라고요? 주인 할머니는 귀가 어두웠다. 직원이 왔다. 짜장면 하나요. 네. 기다리는 사이 CD 재킷을 뜯었다. 둘, 둘, 넷, 사람들이 마구 들어왔다. 짜장면이 왔고 금세 비웠다. 계산을 치렀고 입이 텁텁했다. 맞은편 맥도날드로 입성, 딸기 셰이크 하나요. 구석 창가로 갔다. 쭉쭉. 시간이 남았다. 가방을 뒤적거린다. 책을 꺼낸다. 백 년의 고독(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제목 참. 몇 장 넘기고 시계를 확인했다. 가자. 어둠. 착석. 영화는 길었다. 실제로도 길었고 길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해할만했다. 쉽게 편집할 수 없는 이야기였으리라. 미국과 미군과 온 미국인이 몸으로 깨닫고 세계가 집중한 소재였다.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앉아 있었다. 서성거렸다. 입구를 알았는데 발길은 떠돌았다. 버스를 타고, 골목을 걷고, 비번을 두 번 누르고 문을 열었다. 혼자였다. 둘이었던 공간. 하지만 괜찮았다. 빨래를 개며, 오늘 밤은 돌아오지 않을 여자의 옷을 찾아 냄새를 맡았다. 살갗을 파고드는 진한 익숙함. 온기.
3. 그래서.
지금은 (불특정 다수의 관점으로) 혼자여도 괜찮아진 상황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치유, 회복, 성장. 이런 거창한 단어들과 어울리는지 모르겠다. 언제 다시 고통, 증오, 분노에 휩싸인 혼자를 감내해야 할지 모르니까. 과거의 경험에서 배운 건 없었다. 상처는 피할수록 좋고 나쁜 상황은 미연에 방지할수록 좋았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은 혼자 다니건 무리를 지어 다니건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의연해졌다. 안정, 편안함, 여유 등의 개념을 체화시켰달까. 강신주 철학박사가 벙커 특강에서 그러더라. 고독을 벗어나려면 몰입해야 한다고. 생각해보니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의 수와 크기만큼 고독의 크기도 비례했던 것 같다. 지금은 삶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보다 단순해지고, 몰입할 부분도 명쾌해졌다. 타인의 정도와 비교할 것도 없이 난 지금 혼자여도 고독을 느끼지 않는다. 길었지만 말하고 싶었다. 난 여전히 혼자지만 지금은 괜찮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