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쓰러졌다
이번 주는 바빴다.
회사에서 여러 가지로.
몇 주에 걸친 대형 프로젝트가
두 개나 있었다.
두 개 다 메인으로 참여했고
회의는 끝이 없었다.
내부 협의는 지루했고 고달팠으며
기를 빨리는 기분이었다.
말은 허공으로 사라지고
잔여의 감정은 앙금이 되어
혈관과 피부를 더럽혔다.
구겨진 표정
축 처진 몸
그렇게 몇 날 며칠
밤 새벽 택시
대충 때우는 끼니
거기에
덜컥 걸려버린 감기까지
버티고 버티려다
목이 코로
몸은 열로
컨디션은 제로
기분은 악마가 되어갔다.
누적된 야근
적었던 수면
긴 외근이 겹쳤고
산소부족으로
멍해지기 일쑤
다들 걸리는 감기지만
늘 고통은 개인적이고 은밀해서
나만 아는 지상 최악의 고통 같았다.
육체적인 귀찮음보다
이런 저조한 상태가
타인들에게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는 게
더 싫었다.
그리고 어제 각성과 폭주.
자정을 넘기는 회의 중
뇌관을 건드린 부분이 있었다.
평소 예민했던 영역의 침범은
되려 무감각하게 느껴졌고
시간의 긴박함과 상황의 위중함,
결정의 다급함과 지위의 무게감을 망각한 듯한
어떤 태도.
그냥 넘겨버리는 무례한 무심함. 발언.
겨우 유지되고 있던 긴장이, 어둡게 풀렸다.
낙담. 가망 없음에 대한 불안한 예감.
상실감.
아주 오랜만에 가진 작은 술자리에서는
차마 욕이 나오질 않았다.
무력감이 지배하는 새벽에
택시를 타고
조금의 비를 맞으며
집에 도달했다.
4시
조용히
쓰러졌다.
눈을 뜨고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움직임을 살피고 얼굴과 몸을 어루만졌다.
체온, 부드러움, 따뜻함
예뻤다.
늘 그랬지만
이번엔 더 그랬다.
지각하고 감각하는 모든 부분이 그랬다.
신기해서 자꾸 그렇다 말하고
자꾸 쳐다보고 자꾸 만졌다.
얼마 전 출처가 잘 기억나지 않는
말과 글이 뒤섞이며 떠올랐다.
미인은 그 자체만으로도 불온한 기운을 조성한다고.
사내들을 자극해 분쟁과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고
순진한 마음조차 검붉게 물들이기도 한다고.
지금 느리게 읽고 있는 소설에는
신비로운 체취를 뿜어내는 여인의 목욕을 쳐다보다
떨어져 죽은 사내의 깨진 머리에서 쏟아져 나온 피에서
그 여인의 체취가 묻어 나왔다는 구절도 있었다.
그리고 그 여인을 탐했던 사내들도
흉포한 폭력으로 피를 토하며 죽게 되었다고.
함께 사는 여자에게도
지문 같은 체취가 있다.
아무리 맡아도 사라지지 않는 그런.
혼자 있을 적에는 그 체취가 묻은
그녀의 옷에 얼굴을 파묻은 적도 여러 번이다.
그 여자가 내 눈앞에서 절정의 미모를
뿜어내고 있었다.
마치 환각이라고 여겨질 만큼.
자꾸자꾸 쳐다보게 되고
눈을 맞추고 입을 맞췄다.
독한 소유욕도 아닌
가난한 애정결핍과도 다른
묘한 편안함과 따스함,
불안과 흥분, 증폭되는 감정.
얼굴.
뺨
눈
코
입술
선과 양감, 균형과 조화
얼마나 많이 마주했는데
이렇게 놀라울 수 있을까.
특별히 더 예뻤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내가 소설가라면
400여 페이지를 이에 대한 찬사로
가득 채우고 싶을 만큼
시인이라면 한 권을 가득 채우고
화가라면 캔버스를 가득 채우고
감독이라면 세 시간을 가득 채우고
건축가라면 집을 짓고
정복자라면 국가의 이름을 바꾸고 싶을 만큼.
유치한 마음을 담는다.
시각적으로라도
위로받고 싶은 마음이 투영된 건지
나는 모른다.
나는 그렇게 감각했고
그렇다 인지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