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먼저 사라졌다
애지, 결, 하얀, 석주, 지훈, 승주, 종혁…… 아이폰 메모장에 적어둔 이름을 보고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얼굴은 떠올랐지만 무슨 말로 이 글을 시작해야 할지 먹먹했다. 서울아동복지센터 봉사활동. 정해진 시간. 정해진 인원. 정해진 공간. 정해진 역할. 갈 때마다 아이들은 달랐고 하는 프로그램도 달랐으며 마음도 달랐다. 누구나 달라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이들을 보면 바뀐다. 내가 이전에 무슨 생각과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지 지워진다. 연민으로만 대하는 비겁함은 조금 내려두었지만 아직도 이곳의 아이들을 보면 무슨 말과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막막하고 먹먹하다.
함께 투명 비닐우산에 마커로 캐릭터 그림을 그렸다. 이 한 문장에 소요되는 준비물은 어마어마하다. 리더 성민은 고요하게 모든 것을 구비해놓았더라. 그의 차 트렁크는 나로선 상상도 못 할, 아이들을 위한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 따뜻한 단어로 아이들의 시선을 집중시켰으며 다정한 태도로 낯선 공기를 단숨에 뒤바꿔 놓았다. 두 아이의 아버지라는 단서를 붙여두지 않아도 그는 이미 다음 세대를 감싸 안을 줄 아는 성인이었다. 덕분에 같이 간 인원들도 불안에 떨지 않을 수 있었고, 우산은 점점 아이들이 직접 그려 넣은 다양한 그림으로 채워질 수 있었다.
아이들은 금세 뛰어다니고 소리 질렀다. 작은 목소리와 귀여운 눈으로 원하는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프로그램이 정리될 즈음 창가에 걸터앉아 관망하고 있었다. 다들 알아서 몰입하고 있었으니까. 안아주세요. 아이는 옆에 앉아있고 싶어 했다. 안아서 옆에 앉혔다. 아이 살 냄새가 났다. 다른 아이가 다가왔다. 저도 안아주세요. 그 아이도 안아서 들어 올렸다. 안아주세요. 안아주세요. 두 남자아이는 번갈아가며 거절할 수 없는 눈빛으로 부탁했다. 무겁지도 않았으니까. 가슴팍을 맞대고 등을 감싸 안았다. 조금 숨이 막히고 체온이 느껴질 정도로. 이 아이들이 무슨 일을 겪고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짐작하지도 않았다. 이상하게도, 위로받는 건 나였다.
얼음 사이다에 수박화채를 넣고 나눠주었다. 익숙해진 건지, 오늘따라 이런 건지 칭얼대거나 마구 울거나 어쩔 줄 모를 정도로 어두움을 보이는 아이들은 없었다. 모두 보통의 웃음과 보통의 떠들썩함을 지닌 보통의 아이들 같았다. 나는 말이 점점 줄었다.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학습된 것처럼 떨어질 시간. 다시는 못 볼 것이라는 것을 안다. 아이들이 더 자연스럽게 체득하고 있는 것 같았다. 부스러기를 치우고, 공간을 정리하고, 인사했다. 지난번처럼, 매달려 우는 아이들이 있으면 어쩌나 침잠한 표정을 짓기도 했었는데. 아이들은 먼저 사라졌다. 우리는 떠났다. 다음 사람들이 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이들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돌봐줄 어른들 곁으로 갔으면 좋겠다. 우리처럼 몇 시간 놀고 영영 만나지 못할 그런 사람 말고. 몇십 년 같이 지내며 서로를 챙겨줄 그런 사람들 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