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건의 계약
두 건의 계약. 하나는 샀고 하나는 월세. 둘 다 아파트. 혼자 지낼 때 원룸과 반지하를 전전했고, 결혼하며 빌라 2층을 신혼집으로 4년 넘게 지냈다. 지금은 두어 달 내 다른 동네로 이사를 앞두고 있고, 그전에 또 다른 동네에 살 집을 계약했다. 뭔가 엄청나고 거대해서 감당이 될까 했는데, 글로는 고작 두 세줄. 개인의 역사는 이렇듯 표현의 영역으로 옮겨지면 소소하기 그지없다.
여러 해를 넘기며 머무른 공간에 대한 의미부여는 그 가지가 많아 다소 어지러워지기 십상이다. 감상으로 이파리를 달면 한없고, 사건사고로 열매를 따다 보면 고루해지기 쉽다. 반지하 원룸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빌라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했으며, 이제 아파트에서 잠시 월세로 머물다 옮길 예정이다. 공간에 붙여진 삭막한 이름들. 반지하의 이미지는 사회 부적응자였다. 경제적 여건을 갖추지 못한 자로 해석되기도 했다. 그 시절에 맞는 개인의 영역으로 모자람은 없었지만 더울 땐 더 더운 것 같았고, 추울 땐 더 추운 것 같았다. 지하 거주민이라는 자격지심은 덤. “나 반지하 살아.”라는 이야길 자신감 있게 말하는 것보다 자조하는 편이 더 쉬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20대 후반에 나와 사회의 기대를 동시에 충족시킬만한 성취. 이력서와 자소서를 첨부파일로 담긴 메일의 전송 버튼을 몇 번이나 클릭했는지 모르겠다. 몇 개의 회사에서 예행연습을 마치고 원하던 분야의 정규직이 되었다. ‘운이 좋았다’의 기준이 ‘내 이력서를 받은 인사담당자가 나에게 전화했다.’라면 난 운이 좋았다. 밖에서도 내 책상이 생겼다.
고생담이야 그 시절 대부분의 누구에게나 필수 불가결한 부분일 테니 생략. 반지하에서 빌라로 옮긴 결정적 계기이라면 결혼이었다. 결혼. 지금도 그렇지만 4년 전 당시도 청춘의 2차 스테이지 같았던 것. 1차 취업. 3차 출산(또는 집)이라면 결혼은 인생 타임라인에서 터닝포인트가 될만한 이벤트였다. 많은 이들이 엮인 것, 그 누구보다도 단 한 사람과 영원을 약속하는 것. 담백하게 말하면 또 하나의 자아를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일. 여기서도 ‘운이 좋았다.’의 기준이 ‘여자 친구가 이미 있었다.’라면, 난 운이 좋았다. 처음 만날 적부터 첫사랑, 영원한 동거인으로 삼고 싶은 사람이 있었으니까. 이전의 수많은 글에서 언급했지만 그 사람은 신의 개념에 가장 근접한 사람이었으니까. 완벽. 절대성. 불변 등의 수사를 아낌없이 퍼부어도 모자랄만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녀와 ‘결혼’할 시기였다. 많은 이들이 안구에 달라붙은 콩깍지가 어서 마모되고 풍화되어 깡그리 소멸되길 바라 마지않았지만 그녀는 결혼 과정은 물론 지금까지도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선보이며 일상과 꿈을 동일한 정의로 만들어주고 있다. 결혼하며 빌라로 옮겼다. 투 룸. 가구들. TV. 냉장고. 책장과 책상 등 한정된 개수의 벽을 채우던 사물들 사이에서 애초 두 개였던 시간과 체온을 하나로 섞었다. 그리고 다시 찾아온 시기의 도래. 다른 집을 구하기로 했다.
시작은, “모델하우스 한번 볼까?”였다. 처음이었다. 먼 거리. 들어섰다. 제복을 입은 성형미인 두 분의 안내. 중개인과의 대화 시작. 중앙에 놓인 아파트 단지. 조성 규모와 가격, 조건 등이 큼지막하게 적혀 있는 현수막들. 일사불란한 걸음들. 낯설었다.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음악. 처음 20분이 넘게 중개인의 설명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볼륨을 어디까지 켜놓았는지 고막에 내내 대못이 박히고 있었다. 매우 불편했고 일그러진 표정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블라블라 설명을 들었다. 아내는 귀를 쫑긋했다. 내 시선은 방황 중이었다. 가족오락관에 그런 게임이 있었지. 각자가 헤드폰을 쓰고 특정 단어를 옆 사람에게 전하며 알아맞추는.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우리 편은 졌다. 1차 설명이 끝나고 실제 이사할 곳과 똑같이 지어진 말 그대로 ‘모델하우스’로 발길을 옮겼다. 새집을 상상하게 했다. 임시로 놓아진 다른 가구들, 조명들, 소품들과 함께 공간은 빛났다. 간략한 설명이 이어졌고 다른 면적의 장소로 이동하며 구석구석을 구경했다. 가격 조건을 듣고 아내가 모으고 알고 있던 정보들과 비교했다. 그리고 결정했다. 단숨이라기엔 사전에 알고 있던 정보는 적지 않았다. 하지만 적잖은 액수. 지급 시기. 액수를 마련하기 위한 사전 절차들, 꼼꼼히 체크해야 할 부분. 미리 지불되어야 할 금액. 여러 개의 사인. 의심에 대한 여러 질문들. 기간들. 절차들. 교통편. 출퇴근 조건. 향후 달라질 부분들. 입주 시기. 환경 등을 고려해야 했다. 그렇게 결정했다. 아내와 의견을 맞췄다. 2년 후 입주 예정. 미래의 집이 생기는 순간. 은행이 필요했고, 변수도 고려해야 했다. 결과, 지금 있는 곳에서 이사하기로 했다. 2년 간 살 집을 구해야 했다.
지금 사는 곳(전세)이 있다. 2년 후 살(매매) 곳을 정했다. 그 사이에 2년을 왜 다른 곳에서 살아야 하는가. 배경이 있다. 하지만 다 말하긴 길고 복잡하여 나중에 한번 풀기로 하고, 중요한 점은 결정. 이사를 가야 한다는 것. 지체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2년 후 입주시기에 맞춰 지금 바로 구해야 2년이라는 거주 단위 기간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중개인을 수소문하고 다시 먼 길을 찾았다. 얼마 만에 찾는 부동산인가. 소개였다. 방을 보기 전 대기시간이 필요했다. 10분이나 지났을까. 다른 부부가 들어왔다. 인상 좋아 보이는 남자와 만삭이 가까워 보이는 임산부. 정중한 인사 뒤에 대화가 오갔다. 그 좁은 장소에서 안 들릴 수 없었다. 부동산 측의 미통보로 인해 자신들이 모르는 사이에 돈이 오간 것 같았다. 50대로 보이는 관련 중개인은 뚱한 표정이었다. 그냥 넘어갑시다 식의 책임회피. 남자의 목소리가 커졌다. 다른 중개인이 나섰지만 이미 목소리가 높아질 대로 높아지고 있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그들은 사과를 원하고 있었다. 당사자인 자신들을 제외한 일처리. 미숙함에 대한 책임. 하지만 관련 중개인은 그저 멍하니 허허 표정으로 관망하고 있었다. 신뢰의 급강하. 아내와 나는 (침묵의 대화를 위해) 문자를 주고받으며 자리를 빠져나왔고 주변 부동산에서 같은 동네 같은 조건을 알아봤다. 방을 보고 만족했다. 예정되어 있던 다음 지역으로 이동했다.
구름은 걷히고 볕과 습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정해진 곳에서 기다리고 그 지역 담당 중개인이 에쿠스를 타고 도착했다. 지긋한 연세로 보이셨던 분. 첫 번째 집은 괜찮았다. 하지만 이주 시기가 많이 엇갈렸다. 아쉬운 부분. 여기 오기 전 집으로 좁혀지고 있었다. 좀 멀었지만. 그때 중개인이 하나 더 보자고 했다. 면적에 비해 우리가 제시한 조건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가격. 일단 보기로 했다. 괜찮았다. 아내는 만족했다. 가격 조율이 필요했지만 주인이 완고하다고 했다. 여러 번 통화를 했지만 주인은 조건을 바꾸지 않았다. 아쉬울 게 없다고 했다. 잠시 시간을 달라고 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잠시 배를 채우고 열을 식히며 의견을 교환했다. 아까 본 집과 지금 본 집, 거리, 교통편, 주변 환경, 집 내부의 조건. 방금 본 것으로 기울었다. 가격이 조금 아쉬웠지만 아까 본 집과 비교했을 때 인정하기로 했다. 전화. 결정의 통보. 계약을 하기로 했다. 주인이 오고 있다며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주변을 돌았다. 각자가 선호하는 매장들이 근거리에 있었다. 어떤 덤 같은 기분. 잠시 더위의 무게를 잊었다. 그리고 전화. 대면. 조금 엉킨 부분이 있었다. 굳이 우리가 개입할 필요가 없었던 소재. 하지만 그 때문에 시간이 좀 더 소요되었다. 내용 확인. 금액 확인. 시기 확인. 끝. 정리하면, 집을 샀고 2년을 기다려야 하고, 이사 갈 곳을 정했고 두 달 안에 정리가 되어야 하며 그 안에 지금 사는 곳의 거주 예정자가 있어야 한다. 휴대폰 배터리는 어느덧 빨간색이었다.
방전. 살 집을 정하는 것보다, 당장 이사 갈 집을 정하는 과정이 더 고되었다. 이틀 만에 답을 정했으니 효율적이긴 했지만 그 효율만큼 (기간이 달랐을 때와 비교해보면) 소요되는 에너지의 총량은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았다. 앞으로 해결해야 할 제반 문제들이 남아있다. 하지만 큰 결정의 과정은 넘겼다. 혼자였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알고 있다. 난 많은 고려 후에 결과를 내는 타입은 아니라서. 핵심이라 여겨지는 몇 개만 충족되면 나머지는 감내하는 편이다. 수능으로 치면 몇 과목에만 치중하는 편이랄까. 아내는 달랐다. 그녀는 모든 시험지에 만점의 점수를 원했고 전력을 다해 집중했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협상하고 제시하고 요구했다. 어떤 면에선 내가 매우 답답했을 것이다. 지쳐가는 상황에서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고, 우리는 서로의 감정과 존엄을 지켜주려 애썼다. 사소한 말이 칼이 되지 않기를, 팔다리에 힘이 빠져나가는 상황에서도 배려의 마지노선을 무너뜨리지 않으려, 기대고 의지하며 감성과 지혜를 나누었다.
이사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집이 연인(이라는 부부) 사이에 가장 중요한 공간인 건 맞는 듯하다. 좋은 조리도구가 있어야 좋은 요리를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생활을 위해 보다 개선된 물리적 조건이 갖춰진다면, 우린 반복적인 문제들을 다른 각도로 바라보고, 새로운 문제들에 대한 긍정적 답변을 내놓기 위해 좀 더 다양한 노력들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관념적인 해석일지 모르지만, 집이라는 공간은 소유보다 공유의 대상. 그 안에서 신체적 변화가 있을지 모르고 나이 들며 서로의 다양한 변형을 목도해야 할 순간과 마주할지 모른다. 앞서야 했던 결정들, 더 앞서야 했던 고민들, 오갔던 금액들과 만났던 사람과 사건들. 후회는 예상할 수 없지만 지금은 별로 두렵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