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에게
일정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만큼
불행을 자처하는 행위는 드물어
그 지위에 합당한 대우를
받아야겠다고 스스로 믿게 되거든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어떠한 노력을 했다고 여기지
그쪽으로 질문을 보내면
기꺼이 답변이 와야 한다고
그쪽으로 손을 흔들면
기꺼이 같이 손을 흔들어야 한다고
상대방을 기꺼이 응답하게 하는 자로
자신을 특정하게 만들지
허수아비 주제에
죽어버린 눈깔과 손목 잘린 팔과
아무것도 없는 하체를 펄럭거리며
참새들이 어깨에 앉아 볼을 쪼아 먹어도
무표정하게 가을이 끝나길 기다리지
제발 불태워지길 간절히 염원하며
버려진 논에 추수 같은 건 없어
풀밭에서 쌀은 자랄 일 없고
넌 오래전 버려져서
아무도 찾지 않는 썩은 나무토막
헝겊으로도 가리지 못하는
깡마른 몸으로
한때 햇볕과 대화했다는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생명이었던 적 없는 물체
혼자 서 있다고 특별한 존재일리 없잖아
여전히 그걸 몰라서 혼자 기다리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