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쩌다 만났다

어차피 흩어질 순간들

by 백승권

애초 아무것도 결정되어 있지 않았다. 타오르는 번민의 불길을 식히려 애써 옷깃을 끌어당긴 사이들도 아니었다. 우리는 어쩌다 만났다. 각자 정거장에 내렸는데 어쩌다 같은 방향으로 향한 걸 알았을 뿐이다. 눈인사를 나누고 사소한 견문을 나누다 같은 테이블에 앉고 같은 소재를 이야기하게 되었을 뿐이다. 그렇게 불이 붙었다. 농담 몇 마디였을 뿐인데.

같은 공간에서 하루 8시간 정도 '같이' 머물게 되었다는 사실에 특별함을 부여하기란 무리다. 한국만 해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이러한 상황에 놓이게 되니까. 같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이란 그러하다. 애초 각자의 목적으로 모였다. 그 안에 돈이라는 생계수단과 꿈이라는 환각이 공존한다. 동선이 겹치고 밥을 같이 먹고 하나의 파워포인트 파일을 열고 이야기하게 된다. 옷깃만 스치는 게 아니다. 같은 먼지를 마시고 같은 무게의 스트레스도 겪는다. 그렇게 불이 붙었다. 같은 조직에 몸 담았을 뿐인데.

주사위를 굴려서 너랑 너는 좀 가까워져야겠다,라고 회의에서 결정하는 게 아니다. 교묘한 정치적 책략이 깔려 있거나, 같은 입구를 비껴 지나다가 스텝이 엉켜 어머 하고 자빠져서 몸과 몸이 겹쳐지는 벼락같은 우연도 아니다. 낄낄 대다가 이렇게 되었을 뿐이다. 저급한 농담과 잉여의 시간을 보내다가 이리되었다. 안전거리가 점점 줄어드니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러다 고민의 결이 겹치는 걸 발견하기도 했다. 비슷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저급해. 너는 모르겠지만 너도 우리처럼 저급해. 저급한 무리들이 되었다. 둘이 셋, 셋이 넷이 되었다. 둘이 밥을 먹고 셋이 술을 먹었다. 그렇게 불이 붙었다. 그렇게 결정했다. 한강에서 돗자리나 깔자고.

누구도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프랑스행 비행기에 올라 에펠탑 밑에서 투애니원 노래를 들으며 사케와 함께 초밥을 먹자고 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사실 아무도 실행하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을만한 제안이기도 했는데. 다음날 누구도 시간을 어기지 않았다. 다음날 누구도 준비물을 빠뜨리지 않았다. 봉지에 가득한 먹을 것들. 와인, 캔맥주, 치즈, 올리브, 빵, 크래미, 물, 과자를 나눠 들고 한강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기억나지 않는 개수의 건널목과 터널을 지나 강과 다리와 아이들이 보이는 잔디밭에 이르렀다.

그늘을 찾았다. 돗자리를 깔고 각 모서리를 찾아 앉았다. 캔맥주를 나누고 주제 없고 두서없으며 개념 없는 이야기와 함께 태양볕 밑에서 타들어 갔다. 사실 이미 알고 있는 주제들은 지겨웠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은 유일하게 겹치는 주제였고, 그게 아니라면 우린 오디션 장에 들어선 두려움으로 새로운 주제로 이야기 하기 경진대회를 해야 했을 테니까. 시간이 지루하진 않았다. 낄낄 대며 허기를 채우고 캔과 잔을 기울이고 서로 흉을 봤을 뿐이다. 이따금 꿈이 뭐냐는 쓸데없는 질문으로 진지한 분위기를 형성하기도 했지만, 뭐 상관없었다. 어차피 흩어질 순간들.

해는 기울고 우린 오두방정을 떨다가 자리를 정리했다. 걸었다. 도시는 어두워지고 차들의 후미등은 붉게 물들었으며 나무들은 검어졌다. 천박하게 반짝이는 간판들을 지나 보이지 않는 건널목과 이름 모를 다리 밑으로 계속 걸었다. 좀 더 걸었고 거기서 안녕했다. 당분간은 언제든 볼 수 있는 사이들이었다. 오늘은 한강변 잔디밭 위에서 붉게 타올랐을 뿐이다. 드문 일이다. 하지만 앞으로 드물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누가 먼저든 아무렇지도 않게 던질 테니까. 돗자리 한 번 더 깔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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