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편지

by Glenn

언젠가 이 편지를 쓰게 될 날이

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면

한 줄 더 쓰게 됩니다


나라는 타인을 챙기는 건 힘겨워요

오늘도 몇 번 숨을 몰아쉬었습니다

눈은 풀렸고 어깨는 가라앉고

잘 숨겨지지 않았어요


최선을 다하는 삶은 모범적일 수 있겠지만

태도가 가시적 결과로 환산되지 않는다면

의심과 비교 속에서 부정당하게 되죠

늘 시험당하며 조바심이 들 때가 많습니다

바뀌는 건 없어요 잠시 잊을 순 있어도


가까운 지인은 어릴 적부터

’나는 지금 행복하구나‘ 라는

느낌을 직접 가져 본 적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여러 번이나


아니 사람이 저 단어를 직접

자신의 상태를 대표하는 데 쓸 수 있다니

행복은 늘 대체 단어인 줄 알았는데

표현할 길이 없을 때 적당히 비슷한 걸

가져와 쓰는


저는 없어요

저 단어로 표현할 수 없고


비교와 범접을 허용하고 싶지 않은

다양한 레이어와 부피와 질감의

희열을 느낀 적 많지만

타인들이 쓰는 '행복'으로 포장하고 싶지 않아요

행복을 초월하는 표현이어야 해요

같은 라인에서 그걸 키재고 싶지 않아요

물론 각자의 행복이란 각자의

역사와 맥락, 사연과 눅눅한 감정을 담고 있겠지만

그게 뭐든 저는 행복이란 같은 단어로

저를 표현하기 어려웠습니다


내가 감히 행복이란 단어를

쓸 수 있을까 같은 게 아닌

굳이 행복이라는 단어로 나를

설명해야 할까 정도일 것입니다


설명이 길어질수록 오묘해지겠지만

저는 남들이 쉽고 편하고 열심히 부르짖는

행복이란 단어를 그렇게 선호하지 않습니다

이 정도로 단언할 수는 있을 것 같아요

행복은 제가 추구하는 단어가 아니라고

누군가와 비슷한 내용물이라고 하더라도

저 단어로 감싸고 싶지 않다고


처음부터 없었는지

아직도 모르는 건지

어쩌다 빼앗겼는지

가질 기회조차 없었는지

우선순위인 적 없었는지

굳이 그럴 필요 있는지

알 수 없죠


행복이라니... 평생

입어볼 리 없을 듯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관심과 기호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옷 같아요


이렇게 길게

이야기할 게 아니었는데


연말을 조금 서둘러 정리하고 싶어졌어요


두려움이 크거든요

실질적인 공포가 있어요

서슬 퍼런 지난 경험들에 근거한

늘 통제 불가의 사건들이 너무 많았고

충격과 후유증 속에서

회복이 어려운 내외상을 입고

남은 계절 내내 흉터를 덮고

잠들어야 했어요


떠오르는 기억들로

눈가가 좀 떨리긴 하는데


누굴 만나든

인사를 보내든

서둘러 정리하고 싶었습니다


시간이 남으면 숨어서

다 지나갈 때까지

어떤 시도와 반응도

자제하고 싶어서


목적지가 한참 남았고

밤도로가 붉게 막힌 것도 아닌데

브레이크를 너무 짧은 간격으로

자주 밟고 있다는 느낌도 있죠


더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그동안 너무 많이 잃어버려서

아무것도 남지 않았는데 그마저도

더 남지 않게 될까 봐


덜 슬펐으면 좋겠습니다

힘든 일은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지만

슬픈 일은 속수무책이거든요


한해 내내 슬퍼했더니 기운도 없고

지난주도 어제도 오늘도 그랬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언젠가 이 편지를 쓰게 될 날이

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몇 줄 더 쓰게 되었어요


행복을 믿고 있을테니

부디 행복해주세요


같이 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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