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람들이었다. 한때는
회사가 보통의 일상과의 낯선 거리를 유지할 때가 있다. 이따금 반복적이고 지루한 면이 있다가도 얼음송곳이 안면으로 날아오는 듯한 긴장감이 조성될 때, 업무 평가 기간이다. 한 개의 단어와 한 줄의 문장, 한자리의 숫자가 한 사람의 연봉에 영향을 끼친다. 과정은 고요할지 언정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는 각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무참하기 그지없다. 관계에 선이 그어지고 층위가 나눠지며 호칭이 정확해진다. 아니 평소 흐릿하다 여겨졌던 이러한 부분들이 선명해진다. 그래 나는 회사에 다니고 있었지. 그래 난 회사의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있었지. 나의 시간들은 측정되고 나의 업무들은 채점되고 있었지. 느슨했던 긴장감을 바짝 조이게 만든다. 나의 가치가 돈으로 환원된다. 매달 입금되며 여백에 얼룩을 남기던, 초라한 개수의 숫자들.
작년과 다르다면 내 역할이 피평가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게다가 시간도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누적된 기억을 모아 글과 숫자로 재단해야 했다. 결정적이진 않았지만 다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이 확인해 최종 결론을 내어야 했으므로. 글은 차라리 어렵지 않았다. 수식어가 없어도 정직한 모습들을 옮길 수 있었다. 하지만 완벽할 수 없었다. 무한의 시간이 주어진다고 해도 그건 최선에 가까워질 뿐 누구의 이의도 없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평가는 주관적이었다. 내게 적확한 평가기준이 사전에 프로그래밍된 칩이 이식되어 있지 않았다. 다만 균형감각에 의지할 뿐이었다. 내가 나를 평가하는 것 이상의 고유한 균형감각. 그렇게 적어 내려 갔지만 고심은 여전했다. 여백은 혼자서 메울 수 없었다. 당사자들의 견해가 필요했다. 내가 없는 곳에서 보여준 태도와 능력에 대한 증명, 듣고 싶었고 이게 있어야 불안요소를 줄일 수 있었다. 짧은 시간에 집중하면 가능할 줄 알았다.
셋에게 이야기하고 차례로 불렀다. 방해받지 않는 공간에 자리 잡았고 그들에게 입장과 상황을 설명했다. 어색함을 최소화하고 싶었다. 난 정학 처분을 내리려는 학생주임이나 불구속 입건을 정하는 법의 실행자가 되기는 싫었고, 되어서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차가운 '팀'보다는 좀 더 말랑말랑한 '우리'라는 표현이 유연하게 쓰이도록 해 준 그들에게 고마웠다. 표현했고 마땅했다. 그리고 물어보았다. 내가 모르는, 내가 없었던 순간의 당신들 모습은 어땠는지. 그들은 차분히 전했고 납득할 수 있었으며 미처 내가 놓친 부분도 있었다. 메모했고 참고했으며 일부 수정했다. 무엇보다 안심시키고 싶었다. 한우처럼 너희의 껍질에 A등급을 찍으려 이러는 게 아니라는 점을 인지시키고 싶었다. 하루와 일주일 한 달과 분기 동안 못다 한 이야기들을 듣고 싶었다. 그랬더니 길어졌다. 주변은 어두워졌다. 공기는 차가워졌다. 세 시간 여가 지나서야 겨우 대화를 마칠 수 있었다.
그들의 자리에 나도 있었다.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당시 난 마주 앉은 평가자의 의도를 빠른 시간 안에 최대한 신중히 파악하고 정제된 단어로 이야기하려 무던히도 애를 썼었다. 적어도 오해받지 않고 싶었다. 내가 하지 않은 일로 손해를 감수하기 싫었다. 무지가 있다면 들키기 싫었고 잘못이 있었다면 모르길 바랐다. 오직 긍정적 성과를 드높이 치하하고 가려진 선의를 기어이 인정해주길 바라기도 했다. 그들이라고 크게 다를까. 그들의 불안이 표피를 뚫고 나와 무심한 내게 닿을 일이 있을까 두렵기도 했다. 다만 나쁜 사람이 되기 싫은 심리였을까. 과거 내가 겪은 모호함과 어색함을 다시 겪게 하기 꺼려졌던 마음이 더 컸다.
평가하기에 마땅한 자격과 지위를 가질 날은 아마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어떤 탁월한 시스템이 고안되더라도 양쪽 모두에게 완벽한 만족을 안기는 일도 없을 것이다. 착각과 만용이 개인에게 추기 섞인 안도감을 선사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다른 한쪽에게 같은 농도의 기분을 안기기 어려울 것이다. 약간의 불안과 약간의 망설임, 충분한 고민의 시간과 깊고 신중한 판단을 통해 균형, 최선의 균형감각을 유지하고 싶다. 이런 상황에서 불편함은 차라리 당연함에 가까우니까, 애써 피하며 비겁한 사람이 되려는 건 가장 비효율적 결과로 도달하고 말 것이다. 긴 대화 속에서 가장 많이 느낀 감정과 말은 고마움과 미안함이었다. 앞으로도 시간은 한정되어 있지만, 삭막한 표정 속에서 끝내 이해받지 못한 관계로 남을 수만은 없다. 대화는 멈추지 않겠지만, 개인에게 주어질 숫자는 오롯이 개인의 역사로만 기억되고 영향을 미칠 것이다. 신중한 태도가 모든 긍정적 결과를 담보하진 않지만, 적어도 어깨의 무게를 훈장으로 착각하며 펜을 칼처럼 휘두르고 싶진 않다. 이들에겐 그럴 수 없다. 내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