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지 말길

by 백승권

어떤 결핍은 껍질로만 존재한다. 자리를 비우던 비우지 않던 화인을 남기지 않는다. 애초 그 이전에도 뜨겁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소문으로만 존재하고 그림자가 보이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다. 감이 없다. 전에도, 이후에도.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대부분의 결핍, 떠나간 자리엔 온통 지문과 발자국 투성이다. 흩어진 말과 기워진 기억으로 가득하다. 높은 밀도는 지나온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 모든 시간이 긴밀함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이건…… 어떤 기대감의 교류에서 온다. 서로가 어떤 역할을 해줄 것이라는 대감. 서로가 어떤 기능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기대감. 이는 곳 정서의 안온함에 대한 기대로 이어지고, 결국 미래에 대한 안도로 이어진다. 그와 그녀는 우리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이라는 안도. 지금의 불안과 대비되는 평화에 대한 깊은 안도. 이런 기대가 차츰 피부로 다가오고, 중력으로 느껴질 때, 생각과 근육을 긴장하게 하고 이것을 긍정의 신호로 받아들이게 할 때, 관계는 신뢰의 질량을 확보하고, 어색함의 먼지를 털어낸다. 일정 수준에 이르며 교류는 일정한 활발함에 도달하고, 침묵 또한 정지가 아닌 대기 상태로 여기게끔 한다. 안전한 거리가 확보된다. 상처를 주지 않고, 받지도 않을 수 있는 거리, 또는 부담을 감당할 수 있는 간격. 하나하나 보이지 않는 불문율들이 늘어가고, 이를 지킬 때마다 신뢰가 겹겹이 높아진다. 이따금 간지러운 선언으로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해석은 개인의 몫이지만, 그래서인지 나는 더더욱 갈망했다. 이 교류가 멈추지 않기를, 이 밀도가 낮아지지 않기를, 그 자리와 자리들이 비워지지 않기를.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결핍은 도적같이 찾아왔고, 균형은 허물어졌다.

한 사람의 색깔이 비워진다고 한 폭의 그림이 완성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피카소는 말했다. 파란색이 없으면 빨간색을 칠한다고. 하나의 여백은 이미 채워진 다른 색들에 의해 보완된다. 여백이 하나 더 생긴다고 해도 다르지 않다. 그림은 스스로 완성되기 위한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다. 같은 목적으로 여럿이 모여 위계를 형성하고 역할을 분배한 집단의 특징이 그러하다. 쉽게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애초의 형태를 존속한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 현재의 예고되는 결핍은 조금 다르다. 회복이 멀게만 느껴진다. 내 입으로 뱉었던 말들을 다시금 주워 먹게 만든다. 시한부. 관계의 생명이 다하는 시기의 필연에 대해, 우리가 처음 만난 그곳에서 이야기했다. 말하면서도 이게 뭔 소리인지 알아나 들을까, 반신반의했다. 그리고 나는 당했다. 몇 달이 지난 지금, 난 두 눈덩이와 후두부, 정신과 과거를 두들겨 맞았다.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미래가 살해당했다. 계획은 없었지만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이 되었다. 금으로 만든 앞니가 두 개 빠진 사연 많은 거지가 되었다. 갑자기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 나의 왕국이라는 깃발을 건 적 없었고, 모두의 이름 앞에 내가 너희의 고용주라고 적어놓은 적 없었지만, 내게 유지되리라 믿었던 세계는 이륙도 하기 전에 날갯죽지가 날아갔다. 다시 자라날지 모를 날갯죽지가 정처 없이 허공을 갈랐다. 줍지도 못할 지상으로 떠나갔고,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았다.

두 개의 색이 비워진 것은 한 개의 경우와 차원이 다르다. 두 개의 가능성은 각각이 나머지 각각의 색과 섞여 새로운 두 개, 네 개, 여덟 개의 색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개의 색이 비워진 것은 한 개의 구멍이 아닌 두 개의 가능성이 지닌 엄청난 구멍이 도래할 것임을 의미한다. 성벽을 올리고 있는 과정에서 두 개의 결핍은 대기가 아닌 정지. 진전은 이뤄질 수 있지만, 충분하지 않다. 아니 이것은 당분간 움직임이라고 부르기 애매한 상태. 문제가 아니라면 문제가 아닐 수 있겠지, 누구도 대체해줄 수 없는 일이 생길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심각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은 소멸에 대한 것이다. 만날 수 없는 성과들, 지켜지지 않을 약속들, 왜 이리 골몰할까. 나는 군림하고 싶었다. 너희가 모르는 세계에서 유일한 나침반을 가진 비겁한 사도가 되고 싶어 했다. 마치 나만 따라오면 늪과 구덩이를 피하고 야수의 발톱과 뱀의 혀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으며 그렇다고 너희의 생과 죽음을 책임져주는 일은 없겠지만, 길잡이 노릇을 하며 낙원으로 이끌겠노라고 알코올 중독자의 첫 잔처럼 히죽거렸다. 그리고 모든 망상은 파괴되었다. 알다시피, 지금쯤 너희가 이 글을 읽고 있다면.

그래, 우리는 아니 특히 나는 너무 많이 알고 있는 듯 굴었다. 예측할 능력도 없어 모든 것이 빗나갔고, 막을 힘도 없어 모두를 상처 입혔다. 턱까지 숨이 차오르는 척했지만 진실은 기억나지 않는다. 뭔가를 더 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도 대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잘못한 것과 너희가 놓치고 있었던 것들. 다만 천치같이 보일지언정 투명하고 싶었다. 나는 나침반도, 등대도, 급행 티켓도 될 수 없었지만 조금 먼저 차에 오른 잘난척쟁이가 되고 싶었다고. 그래서 먼저 내릴지언정 잘 가란 인사를 하고 싶진 않았다고. 이제 와서 이러면 뭘 할까 결핍은 영원히 메워지지 않을 텐데. 나는 틀렸고 너희는 먼저 일어났으며 우리는 다시는 평행선 위에서 서로의 그림자를 밟지 못할 것이다. 부디, 돌아오지 말길. 선택한 길 위에서 남겨진, 또 생성될 모든 물감을 쏟아붓게 되길. 어려운 시절에 참,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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