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우리는 아닌 게 되었고
인간은 다중적이다. 매 순간 매 상황마다 감정적 육체적으로 변한다. 변화란 불안요소다. 당사자조차 예측하기 힘들 때가 많다. 자신을 다루기 쉽지 않다. 완벽한 제어란 없다. 하지만 지식과 정보가 합의되고 이해를 공유하는 순간, 관계는 유지된다. 불균형에 대한 완만한 합의점을 갖게 된다. 그렇다고 다중성이 늘 '옳음'의 영역으로 분류되는 것은 아니다. 판단이 끼어들 때 다중성은 위험해진다. 판단자의 수만큼 위협의 개수도 늘어난다. 다중적인 모든 면이 긍정과 부정 어느 한쪽으로 채워질 수 있다. 판단은 중립과 모호함을 좀처럼 허용하지 않는다. 판단 이후, 다중성은 보편적인 다중성과 그렇지 않은 다중성으로 분류된다. 후자는 어렵다. 전자는 누구에게나 있는 다중성에 대한 자각을 내포한 동의와 인정, 이해의 여지를 담고 있지만, 후자는 그 반대편에 있기 때문이다. 다중성이 부정적으로 해석되는 순간, 관계는 무너진다. 해석이 진실로 밝혀지는 순간, 관계된 이들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칠흑의 어둠에 갇히게 된다.
조짐을 인지하고 단서들을 경험한다. 하지만 쉽게 단정 짓지 않는다. 사건이 연이어 터지더라도 평정심을 지켜야 한다. 누구나 다중적일 수 있다는 전제를 잊지 않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염에 휩싸인듯한 충격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해머로 가격 당한 듯한 육중한 진동을 견디기란 쉽지 않다. 학습되지 않은 경험의 파장이란, 그 경험이 이전의 이미지를 전복시킬 때 더욱 크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잘 들리지 않거나 잘 보이지도 않는 듯한, 또는 과거의 여러 대화들이 교차하고 잔존한 시간들이 어지럽게 날리며 층을 이르는 환상과 망상의 이미지가 덮쳐오는 것을 막을 순 없다. 개인이 형성할 수 있는 상황에 한계가 있다고 여겼던 입장은 편견이 된다. 개인이 다중성을 지니고 그늘을 드리울 때 주변과 사방으로 뻗어있던 유대의 고리는 끊어진다. 끊어진 파편들이 칼날이 되어 서로의 세포를 도려내고 살점이 되어 날아다닌다. 망막을 검붉게 물들인다. 신경을 마비시키고 근육을 파열시킨다. 솜털을 곤두세우고 미간의 주름을 조각한다. 고막은 멍해지고 눈꺼풀은 파르르 떨린다. 분절된 기억들이 하수구로 흘러 나간다. 우리가 사라진다. 나는 몰랐다. 나의 우리는 아닌 게 되었고 내가 알던 것들이 모르는 것보다 더 보잘것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