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고 싶은 스물셋에게

글을 쓰고 싶은 게 확실합니까

by 백승권

고백하면, 저는 이런 글을 쓸 자격이 없습니다. 있다 해도 아주 미약하죠. 다시 생각해보니 자격이라니, 어림도 없어 보입니다.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저는 그저 일정한 위치에서 어떤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 위치가 내게 계속 글을 요구해서 글을 쓰고 있는지 제가 그러한 요구에 기꺼이 응하기에 글을 쓰는지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다만 다행스럽게도 저는 계속 글이 필요로 하는 자리에 위치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수년 전부터 조직의 보호를 받으며 스스로가 원하는 글과 다수에게 필요한 글을 쓰고 있다는 점이 제가 이 글을 쓰게 한 이유 중 하나로 작용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제가 현재 글을 쓰고 있다는 점이 그대가 제 말에 귀 기울일 이유는 아니겠지만 한번 흘려듣고 잊는다 하여 어떤 해로움과 괴로움을 유발하지는 않으려 했다는 것을 기억해주십시오. 사실 이런 글은 읽지 않아도 그만일뿐더러 읽었다 한들 그대의 향후 쓰기 활동에 어떠한 영향력도 미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말을 할지 뚜껑도 열기 전에 이런 길과 장황한 변명의 서를 작성하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여기까지 읽었다고요. 왜죠?

지금까지 글을 쓰지 않는 삶을 살았다면, 앞으로도 그렇게 유지하는 삶이 훨씬 편할 것입니다. 굳이 어떤 기록을 남기려는 이유가 뭘까요. 왜 글을 써서 안 그래도 바쁜 삶을 더 촘촘히 쪼개 쓰려고 하는 겁니까. 글의 정령이 그대의 잠자리를 뒤척이게 하고 있나요. 지금 당장 글을 쓰지 않으면 노름판에 왼쪽 손모가지가 날아가나요.(이게 맞다면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생각과 감정을 굳이 가시적 형태로 남겨서 그대에게 돌아오는 보상은 무엇입니까. 잠시나마 작가로 빙의한 듯한 묘하고 따스한 판타지에 휩싸이게 하나요. 이러한 몽상적 경험이 그대의 긴장을 풀어주고 행복이란 감정에 가까이 다가가게 해주나요. 대체 왜 글을 쓰려는 건지 솔직히 궁금하긴 합니다. 이 귀찮고 시간 걸리며 일확천금을 가져다 줄리 만무하고 누군가 알아줄 확률이 굉장히 낮으며 스스로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때로는 스스로를 적으로까지 만들지 모를 이 자학적이고 자괴적인 행위에 왜 매력을 느꼈나요. 대답할 수 없음에도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막연함이 그대를 가위처럼 누르고 세탁기에 줄어든 니트처럼 압박하고 있나요. 그게 정녕 사실입니까.

글쓰기는 불행한 기억의 복원이었습니다. 허락되지 않은 글쓰기에 몰두할 적에 저는 아팠습니다. 낯설고 날 선 환경 속에서 방어할 줄 모른 채 온통 상처만 받고 해소할 줄 모르는 노예의 심정과 육체에 가까웠다고, 그때는 그렇게 여겼습니다. 무지와 부적응에서 영영 헤어 나오지 못하면 어쩌나 두려웠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현실에 스스로를 가여워했습니다. 손발을 허우적거려봤지만 내가 보고 느끼고 경험한 이야기를 완전히 듣고 완전히 이해하며 완전히 위로해줄 대상은 없었습니다. 그것은 애초 치유할 수 없는 생채기였습니다. 기억으로 영영 보존되어 반복되어 경험할 때마다 학습되고 누적될 대상이었습니다. 나는 당시 복원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나와 그대와 우리 모두 중 가장 악랄한 가해자와 가장 연약한 피해자를 구분해야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글로 남겨 지금 이 시간의 목격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보고 있었다고 증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외로움과 직시하는 과정이었습니다. 혼자 세운 가상의 법정, 혼자 할 수밖에 없는 가상의 게임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초대하지 않았고 초대했다 한들 내편 일지 아닐지 모를 미지의 독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훗날 돌을 던진다면 그게 가능해진다면 또 그렇다 한들 내가 무얼 할 수 있었을까요. 혼자만의 선서를 하고 피고와 원고를 해버린 내게 그런 계산이 무슨 의미였을까요. 완전한 혼자는 불가능했지만, 글과 마주하며 망각을 복원하고 분출하지 않았던 악의를 정렬하며 이를 통해 내가 그곳과 그런 상황에서 누구였고 어떠했는지를 재생하는 과정은 내가 인간으로서 견딜만한 외로움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글을 쓰는 시점의 나는 글로 쓰지 못했던 당시의 나와 마주하며 늦게나마 동질감을 확보하고 극단의 결정으로부터 자신을 파괴하는 행위를 방지할 수 있었습니다. 글조차 쓸 수 없는 그런 시간의 도래로부터의 보호막이었습니다. 과거의 나를 소환하며 미래의 나를 지켜내는 최후의 협상이었습니다. 여기서조차 실패했다면 아마 더 많은 것들이 또는 개인의 세계 전체가 무너질 수도 있었겠죠. 비극이 모두에게 기회를 주는 일은 드물겠지만, 글쓰기로 스스로를 베어가며 움직임을 자제시켰던 그 시절은 분명 지금보다 덜 행복했습니다.

글쓰기는 가장 낯선 나를 설득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글을 쓰기 위해 바꾼 것은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글을 쓴다는 행위와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가진 처연함 외에 모든 것이 바뀌어가고 있었고 이미 바뀌었으며 바뀔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의 틈 사이에서 내가 숨을 수 있는 곳은 없었습니다. 도망칠 곳도 없었고 당면한 변화에 적응한다는 서약을 하고 마치 적응한 척 어색한 웃음으로 대화를 이어나가는 나날을 숨죽이며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제에 적응한 후에 오늘에 부적응하고 오늘에 적응하면 내일 어색하는 과정 속에서 글을 쓰는 행위가 주는 쾌감은 삶을 관통하는 걸음의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는 권한이 부여된 듯한 착각에서 비롯되곤 했습니다. 글을 쓰는 동안에는 글의 노예 거나 글의 주인이었고 후자라면 마치 지상 최후의 권력자가 된 것처럼 도취된 채 백지 위를 휘저었습니다. 망각을 기워내는 동안 망각할 수 있다는, 상처를 재생하는 동안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있다는 안정감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낯선 내가 어제의 학습된 나와 만나게 하는 가장 적극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서로를 알아보게 하는 증표의 기능을 글과 글쓰기는 가능하도록 도왔습니다. 덕분에 나는 시간 조절자와 기억 편집자가 되어 개인의 역사를 유린할 수 있었습니다. 진실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사실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으며 상징을 흐릿하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누가 이득을 봤는지 알길 없지만 내가 이를 위해 분명한 중재자로서 기능한 건 증명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나는 왜 내가 쓰는 이유를 그대에게 쓰고 있어야 하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고 끝내 알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쓴 어떤 단어와 문장과 입장과 의견은 단 한 푼의 부가가치도 창출할 수 없을뿐더러 자칫 가장 위험천만한 태도로 확장될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난 다시 한번 재차 경고하고 묻고 싶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글을 쓰고 싶은 게 확실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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