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설명하기 힘든 마지막 여름

by 백승권

들떠 있었다. 운이 좋은 건지 날씨가 좋은 건지 사람들이 좋은 건지 위치가 좋은 건지 뭐든 그냥 다 좋았다. 스페인에서 날아온 커다란 샴페인, 바람결에 스삭거리는 우거진 풀숲, 지구를 불사르는 태양광선, 리본으로 포장된 스타벅스 마카롱까지. 걷다 걷다 걷다가 그늘 밑 익숙한 곳에 걸터앉았다. 텅 빈 공원, 꽉 찬 하늘, 수제비 같은 구름이 침공한 듯 뒤덮고 있었다. 삐삐밴드의 딸기를 꺼도 될 것 같았다. 바람 소리가 충분히 몸을 흔들고 있었다.


샴페인 기포가 잔을 점령했다. 마카롱은 하나 둘 뜯어지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먼저 말을 시작했고 웃다가 마셨다. 병은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시간은 어제와 똑같은 속도로 흘러갔지만 눈코입은 어제와 다른 풍경에 놓여 있었다. 우리 중 한 명은 공식적인 마지막 오후였고 이는 곧 우리라는 무리의 마지막 오후이기도 했다. 내내 드러냈던 아쉬움은 바닥을 드러낼 줄 몰랐다. 하지만 그보다 지금 이 자체가 마치 신기루 같았다.


정지된 이미지들이 느리게 흘러가는 듯했다. 보이고 들리고 말하고 부닥치고.... 정적이거나 동적인 것들의 조합과 오감의 총합들보다 더 많은, 정의되지 않은 모호한 것들에 온통 둘러싸여 있는 듯했다. 기억에 남은 것들이 흐릿해지더라도 이런 시간이 우리 주변을 메우고 있었고 이 안에서 서성거리고 잠시 앉아있었다는 점은 쉽게 날아가지 않을 듯했다. 잘 닦인 나무 위에 앉아서 세계 평화와 식량 위기 주제를 논하지 않았다. 사소하고 소소해서 기억나지 않더라도 감정과 감각의 결여를 일으키지 않을 것들이 침묵과 소리 사이를 오갔다. 시계를 보지 않았다.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았다. 사람도 사물도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어떤 시절의 마지막 낮이었다. 비공식적인 마지막 장면이었다. 돌아오는 길은 느리고 힘이 적었다. 음악 소리는 오래전부터 들리지 않고 있었다. 그림자들은 흩어졌다. 갔던 곳을 벗어나 왔던 곳으로 사라져야 했다. 저녁과 밤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예정된 저녁과 밤이었다. 그렇게 마지막 낮이 끝났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오직 지나온 이들만의 기억과 해석으로만 회자되고 편집될 마지막 낮이.


짧은 생에 여러 시절을 지난다. 대부분 지난 후 좋은 줄 알게 되고, 기대했던 앞날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부지기수다. 지나면서 좋은 감각을 유지하기란, 그런 운 좋은 시간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는 결코 많지 않다는 걸 보통 아주 나 아중에 알게 된다. 우리에게 그런 적이 있었다는 것을. 이번엔 조금 달랐다. 계절을 관통하는 동안 무감하게 흘려보내지 않았다. 깨어있었고 끊임없이 오가고 있었으며 소중한 것들을 놓치지 않으려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침묵의 간극과 오해로 끝날지도 모를 소동들 속에서 견고한 선으로 서로를 잇고 있었다. 각자의 길에서 우연히 교차했던, 겨울과 봄과 여름이었다. 춥고 맑고 뜨겁게 지날 수 있었다. 지금이 이토록 아름답다고 여기면서. 똑같은 날은 오지 않을 거라는 비밀 속에서.


흔하디 흔한 희망 중 하나를 집어 들어 먼지를 닦아내어 본다면,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 물론 (불가능하겠지만) 같은 이름의 계절과 (불가능하겠지만) 같은 숫자의 시간대를 정하여 심지어 (역시 불가능하겠지만) 같은 경도와 위도의 장소가 될 수도 있겠지만, 다시 만날 때는 다른 모습일 수밖에 없다. 쓰다 보니 어떤 선언 같네. 글이 끝난다고 분리수거 같은 정리가 될 리도 없을 텐데. 글을 끝나지 않으려고 균형을 잃은 단어들로 남은 여백을 줄이고 있다는 게 우습다. 마지막 문장을 쓸 차례다. 단 하나의 이미지만으론 설명하기 힘든, 마지막 여름은 이렇게 떠나버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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