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진언의) 비밀을 듣다가

by Glenn

느리게 하나씩 피아노 건반이 눌릴 때마다

마이크 가까이 다가선 목소리 울릴 때마다


못 견디고 못 견뎌서

휩쓸리고 부서지고 흩어지며

기존의 형태를 모조리 잊거나 잃고서

사라지고 파괴되는 이미지에 휘감겨


곡을 듣고 있구나가 아닌

곡에 의해 섬멸되는 체감


점점 크게 듣고 계속 듣다가

자의로 듣는 게 아닌 사로잡혀

호흡이 위협당하듯 거리를 두지 못하고 있어


이 곡이 억 광년 먼 우주에서 날아왔을 리 없고

익숙하게 떠오르는 뮤지션들이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러하기 때문에

또는 상황과 시즌이라는 맥락과

잃어버린 퍼즐 조각을 여전히 못 찾다가


피를 빨리듯 신경이 묶이듯 까닭을 뒤적거려요

한숨으로 메마른 입술과 퀭하고 어두운 눈으로


넬 Let's Take a Walk 앨범 버전의 Good Night

선우정아 동거

전람회 졸업 EP의 다짐

루시드 폴 사람들은 즐겁다

김동률 귀향 앨범의 떠나보내다(hidden track)

조성진 DEBUSSY 앨범의 Clair de lune

류이치 사카모토 async 앨범의 andata

글렌 굴드 The Sound of Glenn Gould 8번 트랙

마이클 니만 피아노 OST의 The Scent of Love

데미언 라이스 9 앨범의 Elephant

...


동시 다발로 떠오르는 곡들을

거울로 비추며 대조해도 같지 않아

그때부터 지금까지와 지금은 달라서

이 음, 목소리, 숨, 가사가 아니라서


침몰과 침식과 질식 속에서

이대로 버려져 퇴화되며 사그라드는 것도

재가 되는 것도 먼지가 되는 것도

그렇게 되더라도 그게 그런대로 나을 것 같아

생명의 지속에 연연하기 위한

다른 의견이 떠오르지 않아요


앗아간 듯 힘은 없고

헤어진 듯 아픈 데가 있어요

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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