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승

의식의 흐름

by 백승권

혼자 걸었다. 터벅터벅. 같이 걸을 사람이 없었다. 터벅터벅. 볕을 지났다. 풀숲을 지났다. 하늘 밑을 지났다. 흙 위를 쓸었다. 터널을 지났다. 계단을 올랐다. 터벅터벅. 며칠 전과 비교하지 않았다. 터벅터벅. 철망이 보였다. 터벅터벅. 농구대가 보였다. 터벅터벅. 앉을 곳이 보였다. 비교하지 않았다. 멈춤. 여전히 난 그 시간대에 있었다. 멈춤. 그 시간대에서 빠져나오지 않은 채 그곳에 다시 와 있었다. 오후였다. 혼자 멈춰 있었다.


앉아서 눈을 감지 않았다. 그때 보이던 것들이 지금도 보이고 있었고 그때 지나던 구름들이 지금도 지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구름은 아니었으리라. 그때의 구름이 어디로 향해 지금쯤 어디에서 멈췄는지 알지 못한다. 그때 멈춰 있던 것들은 지금도 멈춰 있었고 그때 움직이던 것들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멀어지거나 가까워지며 지구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내가 가만히 있더라도 어차피 나를 포함한 모든 것들이 각자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그 자리에 멈춘 후에야 알게 되었다. 어차피 그때는 누가 가르쳐 줄 필요도 없었고 말했다 한들 듣지 않았을 것이며 들었더라도 지금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는 그 정도였다. 지금의 상황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았고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는 지금이 아니었으니까.


멍하니 앉아있다 등을 나무 위에 포개었다. 수첩을 배니 시선은 공중으로 향했다. 나뭇잎들. 가지의 선들. 하늘의 면 위에서 겹겹이 레이어를 만들고 있었다. 육중한 헬기 소리가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구름은 폭발하고 나무는 조용했다. 욕을 하며 농구공을 튀기는 아이들과 저 멀리 뭔가를 차고 뛰는 성인들의 목소리가 간간히 바람에 섞였다. 빛이 너무 강해 눈꺼풀이 떨리고 있었다. 감았다. 불안했다. 잠들까 봐가 아니라 깨지 못할까 봐. 감았다 뜨고 뜨다가 다시 감았다. 나뭇잎은 선명해지다 흐려지고 흐려지다 선명해졌다. 몸을 일으켰다.


돌아온 길로 돌아가기로 했다. 계단을 내려가고 물가를 지나고 터널을 지나고 볕을 지나고 오르막길을 오르고 도로 옆을 지나고 풀숲을 지나고, 지나면서 아무 말도 없었고 아무 기억도 떠올리지 않았다. 아무도 부르지 않고 아무도 찾지 않았다. 며칠 전과 같은 길이었고 며칠 전과 다른 길이었다. 며칠 전과 다른 사람이었고 며칠 전과 다른 하늘이었다. 내가 어딜 다녀왔는지 아는 사람들에게만 내가 어딜 다녀왔는지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목적도 없이 방향도 없이 의식과 같은 재현의 행위더라도, 그게 무엇이라도 웃고 뒤집어지던 며칠 전이든 혼자 터벅이던 지금이던 상관없었다. 나아질 것도 나빠질 것도 그대로일 것도 그렇지 않을 것이라도 아무래도 괜찮았다. 오롯이 혼자 걷고 멈춰도 되는 곳이 생겼다. 매번 다르겠지만 매번 같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차피 박제시킬 수 없고 해석 또한 매번 제각각일 테며 언젠가는 결국 그곳에 대한 처음 기억이 무엇이었는지 누구도 모르게 될 것이다. 웃긴 일이다. 그때 며칠 전만큼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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