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를 향한 부고. 부고니아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부고니아

by Glenn

현실 고통의 강도가 임계점을 넘으면 이성적 이해의 여지가 사라진다. 납득을 위해 상상력을 발휘한다고 해도 소용없다. 구체적인 물증이나 가해의 확실한 출처가 필요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고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세상이 무너진다. 고통의 전이가 급속도로 진행되며 헤어 나올 수 없는 무력감이 덮치면서 분노는 내부와 외부로 정신없이 확산된다.


이런 극단적 긴장 상황에 음모론이 한 방울 떨어지면 초저온에도 발화점이 생성되어 사고 체계가 순식간에 불타오른다. 그동안 겪은 모든 비극의 구멍이 메워진다. 이유가 완성된다. 망할 외계인들이 쳐들어와서 우리 가족을 죽이고 내 인생을 망쳤구나. 복수가 삶의 전부가 된다. 차근차근 체계적으로 빈틈없이. 미국인으로 위장한 보스급 외계인을 납치한다. 엠마 스톤과 똑같이 생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글로벌 기업 대표.


테디는 절박하다. 중환자로 누워있는 엄마를 살려야 한다. 그래 니 말처럼 내가 외계인 맞다고 자백을 받고 엄마를 살려내고 지구도 구해야 한다. 나는 지구인 대표니까. 외계인이 타고 온 우주선 디자인과 머리카락으로 원격 커뮤니케이션 하는 것도 다 알고 있다. (지구인 대표답게 수트도 입는다) 엠마 스톤과 똑같이 생긴 납치된 외계인 두목은 저항과 부정을 반복하다가 부분적으로 인정하고 타협의 단계로 들어선다. 그 과정에서 테디는 엄마를 죽인다. 증인도 있었으니 테디는 엄마 살해범으로 수배될 것이다. 외계인의 말을 믿어서 저질렀다고 주장해도 쉽사리 인정되지 않을 것이다.


테디와 돈은 얼마나 음울한 삶을 지나왔을까. 돈은 테디를 의지하고 아끼고 사랑하고 범죄를 같이 저지르고 끝까지 배신하지 않으며 스스로의 머리에 총을 쏜다. 피에 젖은 외계인은 카오스 상태에 빠지지 않는다. 산산조각 난 테디의 머리가 날아올 때 잠시 기절했지만 잠시였다. 불쌍한 테디와 미셸이 보낸 며칠의 사건들은 미셸에게 하나의 결론에 이르게 했다. 현대 인간들은 더 이상 답이 없구나. 외계인 입장에서 인류는 하나의 창조물이자 실험체이며 지구라는 행성의 유지를 위해서는 불순물, 아니 유독물질이다.


미셸은 액션을 취하고 지구 대표 테디와 돈을 앞서 잃었던 인류는 그렇게 절멸한다. 수백만 개의 버섯구름이 뒤덮는 퍼포먼스와 함께 하늘과 대지가 뒤흔들린 게 아니었다. 아주 말끔하고 고요하게 인간들만 모조리 숨이 끊어진다. 직원도 임원도 아이도 어른도 모든 상황 모든 거리 모든 순간의 모두가 동시에 전원 플러그가 뽑힌 듯 멈추고 쓰러진다. 아름다울 정도로 정교하게 펼쳐진 인류 멸종의 풍경들. 문명이 남긴 공간의 선과 면, 구조물의 실루엣은 남겨진 채 인류는 강제적으로 지구 역사에서 역할을 종료한다.


의견이 다른 쪽의 완전한 최후를 바라는 이들이 꿈꾸던 풍경일 것이다. 자연 부패하여 소멸하려면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벌레와 이끼로 뒤덮여 언젠가 인류 주거의 흔적조차 남지 않을 것이다. 체르노빌처럼 야생동물과 식물들로 뒤덮일 것이다. 그때는 아마 외계인들이 대량으로 이주해서 새로운 인류가 될지도 모른다. 그들은 테디처럼 가족이 죽어가는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될까. 아마 그렇다면 다른 외계인과 갈등을 일으킬 여지가 적을 텐데. 음모론자가 되지 않아도 될 텐데. 범죄를 저지르지 않아도 될 텐데.


세상의 모든 범죄 계획과 극단적 음모론 주장이 인간에 대한 연민을 근거로 두고 있지는 않지만 테디(제시 플레먼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다. 외계인 침공만이 지구인으로 사는 자신의 고난을 합리화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외계인 관점에서는 그저 실험실 쥐들의 헛소동일 뿐이다. 만들고 지켜보고 개입하다 죽이고. 관리에 실패한 대량 생산품.



월, 목,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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