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 어쩔수가없다
난 이렇게 살게 돼 있어
어쩔 수가 없어
이 이면지 같은 새끼!
난 무슨 호두까기 인형 같은 거 주고
원래 더러운 거 위에서
맛있는 게 자라
1. 만수는 살인자다. (맙소사) 2. 만수는 취업 최종 합격을 위해 다른 후보자들을 살해한다. (아니 아무리 사정이 딱해도 그렇지 살인을?) 3. 만수는 아내와 두 자녀와 개 두 마리로 구성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다는 일념으로 취업 경쟁자들을 살해한다. (아... 가족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건가? 이해해야 되는 건가?) 다시 첫 문장으로 돌아오면, 만수는 살인자다.
주인공의 사연에 몰입하며 상황에 공감하고 감정을 이입할 때 만수의 살인은 납득이 갈듯 말 듯 보인다. 그래 갓난아기가 배고프다고 울면 마트에서 분유라도 훔쳐 달아나려는 게 부모 마음일 텐데 개 두 마리까지 6인가족 생계가 달렸으면 다른 사람 목숨이 작아 보이기도 할 테지. 사내에서 의리를 부르짖다가 모가지 잘리고 재취업 안 하면 굶어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와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는데 오죽하겠어? 아니 그런데... 후보자를 다 죽였어? 성인 남성 셋을? 북한총으로? 전기톱으로 사지를 막 자르고? 발가벗긴 후 사지를 정성스럽게 꽁꽁 묶어서? 이건 뭐 연쇄 살인 재능을 발견하기 위해 해고와 재취업이라는 고난이 필요했다는 결론에 이른다.
물론 가족의 생계라는 건 몇 개의 단어로 정의하기 어렵다. 행복은 다양한 층위의 세부 요소가 결합된 복합적 개념이다. 가족 구성원의 경제적 정서적 안정이 만수가 추구하는 행복의 최상위 조건이라고 가정한다면 그가 처한 공포는 생존과 직결된 공포일 것이다. 자신의 실직과 재취업 실패로 인해 경제적 회생이 어려워지고 이로 인해 가족이 무너진다면 만수는 사회적 죽음에 이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곧 생물학적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종이를 만들기 위해 무참히 파괴되는 산림처럼 만수의 삶 또한 그리 될 수 있다. 흙에서 자란 식물이 주머니로 들어가는 화폐가 되는 과정을 담당하던 만수는 무서웠다. 살고 싶었다. 남은 의자는 하나였고 거기에 앉으려면 경쟁자가 없어야 했다. 그래서 없앴나? 불안을 줄이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 그렇게 프로페셔널하게? 전문 킬러처럼? 유혹부터 매립까지 말끔하게?
정상성이란 환상이다. 만수의 선택과 치르는 대가에 대한 기저에 깔린 영화적 설명은 많지 않다. 다만 만수는 가족의 상실이라는 (평온한 일상을 파괴한) 위기에 처하고 이를 봉합하기 위해 경쟁자 살인이라는 극단적 액션을 저지른다. 살인과 살인 사이에 망설임이 없다. 그는 유전자와 알코올 부작용과 상황적 억압이 총합된 상징, 복합체인가. 그렇다면 다른 경쟁자들, 만수에게 당한 희생자들은 단순 아메바, 종이인형인가. 그럴 리 없다. 하지만 너무 납작하게 그려진다. 그들은 차례차례 만수의 침입을 기다리고 있다. 무방비 상태이며 속절없이 당한다. 해프닝이 이어지지만 단출하다. 그들은 기꺼이 목숨을 잃는다. 만수의 새 출발과 만수가족의 행복을 위하여.
'우리 가족'이라고 흔히 불리는 친족 공동체의 중장기적 생존과 운영을 위해 타인은 죽음은 필수 요소인가. 이제는 잘 쓰지도 않는 종이를 만든다고 숲을 부수는 파괴적 악행에 대한 가해자들끼리 죽고 죽이게 만드는 자연의 이치인가. 분열된 가족을 재구성한 가족의 구성원인 만수(이병헌)는 다른 가족의 구성원을 영원히 해체하며 자기 가족의 영구적 분열을 방지한다. 햇살 안에서 서로를 동그랗게 끌어안는다. 여기까지 쓰다 보니 복수는 나의 것 대사가 떠오른다. 가족을 잃은 남자 동진(송강호)은 가족을 잃은 다른 남자 류(신하균)의 아킬레스 건을 끊기 전 울먹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너 착한 놈인 거 안다. 그러니까 내가 너 죽이는 거 이해하지?" 박찬욱 감독의 '어쩔 수가 없는' 캐릭터는 처음이 아니다. 공장과 노동자에 깊히 얽힌 2025년의 만수와 2002년의 동진은 박찬욱 감독의 쌍생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