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의 생존 스킬
프로의 생존 스킬, 평정심
프로들은 이 치열한 인간과 집단의 압박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
관계.
명사다. 1. 둘 이상의 사람, 사물, 현상 따위가 서로 관련을 맺거나 관련이 있음. 또는 그런 관련. 2. 어떤 방면이나 영역에 관련을 맺고 있음. 또는 그 방면이나 영역. 3. 남녀 간에 성교(性交)를 맺음을 완곡하게 이르는 말. 4. 어떤 일에 참견을 하거나 주의를 기울임. 또는 그런 참견이나 주의 등으로 정의되고 쓰이고 있다. 소통, 역시 명사다.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함. 2.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 등으로 정의되고 쓰이고 있다. 넓게 말하면 인간계의 남녀노소, 좁게는 지금 이 글을 읽고 있고, 진정한 프로를 꿈꾸는 당신에게도 깊숙이 적용되는 사회생활을 이루는 거의 모든 것. 모든 문제의 시작이자 모든 답의 끝. 인류는 단체생활을 시작한 이후 이 문제에 대한 개선과 진보를 위해 힘써왔지만 여전히 극소수를 비롯한 나머지 대다수는 적응하지 못하고 끙끙대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처세서가 대형서점의 한 코너를 커다랗게 점하고 있는 풍경이 이를 뒷받침한다.
자칭 관계와 소통의 전문가라는 이들이 하루에도 수십 권씩 새 책을 내고 있다. 불황에도 이런 책들은 여전히 순위를 점하고 있고 많이 팔려서 찾고 많이 찾아서 팔린다.(물론 출판사와 서점의 마케팅 효과라는 점도 절대 간과할 수 없다.) 욕하면서 읽고 덮은 후에는 잊는다. 공감대가 없진 않지만 그런 공감대는 SNS를 부유하는 글귀들 속에 더 많다. 뭐가 문제인가. 인구는 나날이 늘어가고 기술문명은 상향 평준화되고 있는데 인간은 왜 아직도 옆 사람에게 말하는 법과 칭찬받는 법을 알지 못해 안달하고 있나. 학교에서 안 가르쳐줘서? 집안 분위기가 엉망이라? 타고난 성격이 소심 그 자체라서? 자신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전문가의 조언을 찾아봐도 깜깜하기만 하다.
관계와 소통이 왜 문제인가. 혹시 문제라고 인식되는 순간부터 문제인 것은 아니었나?
이 짧은 지면의 마지막 단어를 읽는 순간, 당신은 관계와 소통의 전문가가 되어 있을 것이다… 라는 사이비 교주 오늘의 말씀 같은 말은 말도 안 될뿐더러 누가 한다고 믿어서도 안 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계에서 특히 사회생활에서 벌어지는 관계와 소통에서 비롯되는 온갖 불행한 일들은 나와 누구의 탓도 아닐뿐더러 시간과 공간의 미로에 갇힌 처연한 운명 탓도 아니다. 이건 그저 벌어졌고 벌어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벌어질 예상 가능한 사건들일뿐이다. 개인의 통제력을 벗어난다. 단 한 가지의 답이 있었다면 로또 1등이 10만 명인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결국 그 답이 한 가지라는 이유만으로 종말에 가까운 재앙들이 펼쳐질 테니까. 모든 경우에 따른 모든 답은 누구도 말해줄 수 없다. 다만 가중될 수 있는 혼란을 피하는 방법은 존재한다. 오우삼 감독이 연출하고 양조위, 금성무가 출연한 영화 적벽대전(赤壁: Red Cliff, 2008~2009)을 봤다면 이제부터 하는 말이 더욱 쉽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평정심.
손권 휘하의 명장 주유가 조조와의 대전을 앞두고
천하태평한 표정으로 노니는 모습에 장수들은 갸우뚱한다.
그는 수많은 전쟁과 희생을 치러온 장수다. 머리가 돌아서 엷은 미소를 짓고 있을 리가 없다. 가장 칠흑 같은 밤이 지나고 가장 고요한 새벽이 지난 후에야 여명이 타오르듯, 주유는 터질듯한 긴장감을 감추고 차분한 표정으로 때를 기다리며 전열을 가다듬는다. 바다 위에서 활활 불타는 배들과 아비규환 속에서 산산조각 나는 성벽의 스펙터클보다 그의 침잠한 표정이 인상 깊었다. 모든 극한의 감정을 부드럽게 에워싸고 있던 모습. 그 장면에서 깊숙한 충격을 받았다. 태풍의 눈 한가운데에서 벌어지는 고요를 그는 겸허히 이행하고 있었다. 자신은 물론, 어느 누구보다 아끼는 장수들의 명운이 걸려 있는 상황에서, 패한다면 자신과 나라와 역사의 일부를 송두리째 빼앗길 수 있는 전쟁 앞에서 그는 웃고 있었다. 이건 마치 게임이야.라고 자신에게 최면을 걸 듯. 결과는? 영화가 기록했다시피 조조의 상투를 베었다.
잘생기고 용감한 자에겐 미인과 운이 따른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누구나 매일 같이 자신만의 적벽대전을 겪는다. 마음엔 풍랑이 일고 이마엔 열이 솟는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실언을 하고 근육으로 전이된 감정으로 인해 실수를 한다. 후회하면서도 반복하고 알면서도 어쩌지 못한다. 악순환이 끊이지 않고 결국 나는 결국 이런 애라는 체념의 단계에 이른다. 이때 굳어진 근육과 길들여진 본능이 몇 권의 처세서와 몇 회의 명강의로 바뀔 수 있을까. 외부적 자극은 상황의 표피에만 영향을 미칠 뿐 정신과 육체의 지배자인 자신에겐 미미하기만 하다. 지금껏 몇 개의 회사에서 몇 명의 인간들을 만나며 몇 번의 좌절과 사건을 겪었는가. 절대적 시간이 부여하는 경험은 고귀하지만 그것이 프로와 비프로를 구분해주진 못한다. 프로와 비프로를 계급으로 구분 짓고 싶지 않지만, 적어도 부적응자로 스스로를 낙인찍기 전에 구원의 기회는 주어줘야만 한다. 프로페셔널하게 관계와 소통을 이어가는 방법, 바로 내면의 평화와 고요를 갖는 평점심을 소환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마음과 감정이란 게 그렇듯, 부른다고 오지는 않는다. 프로답게 관계와 소통을 주무르는 게 그렇게 쉬울 리 없다. 어렵다. 그리고 이걸 성취할 가치가 분명히 있다.
평점심을 소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처세 강사가 아니다. 다만 내 경험의 의거, 나름대로 확신을 갖는 방법을 말해주고자 한다. 이미 다른 이들이 먼저 이야기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당신은 잊었고 똑같은 고민에 휩싸였으며 지금은 나와 단둘이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귀 기울이도록 하자. 스치듯 지나가는 조언에 사회생활을 다루는 스킬 전체가 재조립될 수 있다.
먼저, 무시하라.
무시를 밥 먹듯이 하라. 감정적인 날을 세우라는 말이 아니다. 단순한, 하지만 분명한 입장을 내포한 선긋기다. 우유부단함은 사회생활에서 자신을 제대로 어필하지 못하는 만인의 고질병이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닐 때 상대방은 혼란에 빠지고 짜증을 장착하며 분노와 함께 발산한다. 이러한 감정적 대응이 교차하면 이로운 건 아무것도 없다. 구겨진 서류와 정리되지 않은 회의, 야근과 주말출근, 흐트러진 사내 인간관계와 광속으로 퍼질 오해와 정처 없이 휘날릴 소문뿐이다. 무시는 버리기, 단절이라는 말로 대체할 수도 있다. 거품을 치우는 것이다. 굳이 사례를 들진 않겠다. 사회에서는 모든 상황이 특수한 경우니까.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외에, 해야 할 일 외에, 신경 써야 할 일 외에 모든 모호함을 버리자.
그러한 요청 상황이 온다면 무시하자. 거부의사를 밝히고, 각자의 역할을 명확히 하며,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낭비할만한 모든 요소들을 배제하자. 사회생활 진입 연수가 높아지면서 자신을 뭔가 다양하게 신경 쓰고 여러 가지를 해야 할 사람으로 인식해야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당신은 전지전능하지 않다. 당신은 상황이 발생하는 모든 곳에 있을 수 없다. 대부분의 문제는 사공이 많아졌을 때 불거진다. 모든 사람이 하나의 노를 잡을 필요는 없다. 스스로를 얽매고 있는 모든 거추장스러운 내면과 외면의 규제에서 벗어나자. 너무 쉬운 이야기라고? 이걸 못해서 당신은 지금 프로가 아닌 건 아닐까?
두 번째, 동정하라.
동정은 계급을 구분 짓는다. 받는 자가 아닌 주는 자가 선을 점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갈등에서 인간의 팔은 안으로 굽는다. 자신을 가장 이해한다. 물론 당연하다. 그리고 자신을 가장 동정한다. 세상에서 가장 불운한 사건과 오해에 얽힌 가엾은 자로 포지셔닝한다. 자기 자신에게만 그리 적용하고 이것을 자기 자신만 인지하며 자기 자신에게만 설득하고 결국 자기 자신을 그렇게 만든 타인과 외부 상황에 분노와 증오의 화살을 돌린다. 혼자만의 힐링 잔치는 이렇게 시작된다. 자신을 제외한 모두를 어둠과 악의 세력으로 간주하게 된다. 자신은 희생자일 뿐이다. 희생자는 약자, 구원받지 못한 자, 다시 일어서면 할리우드 인간승리 영화처럼 해피엔딩을 맞을지 모르지만 대부분 거기서 그친다. 나는 약자야. 나 외에 나를 동정할 사람 아무도 없어. 엉엉. 개선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나아지는 것은 잠깐의 기분뿐이다. 다시 상황이 발생하면 나는 다시 세계 최악의 약자가 되고 나는 다시 나를 동정한다. 이게 뭔가.
역지사지라는 깊은 의미를 되새김질하며 설파하진 않겠다.
상대의 상황의 사실과 진실을 모두 다 이해할 필요도 없다. 이건 단순히 역할의 전환이다. 관계와 소통의 난이도를 초월하는 진정한 프로페셔널을 원하는가. 동정받는 자가 아닌 동정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나는 불쌍해가 아닌 너도 참 불쌍하다… 정도의 전환만 있으면 된다. 인식의 심지를 바꾸고 이를 프레임으로 만들면 된다. 구체적 근거를 일일이 찾아가며 완벽한 논리구조를 만들 필요도 없다. 동정의 방향을 전환해보자. 울고 있는 게 자신뿐이라고 생각할 필요 없다. 상대 역시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고 부메랑처럼 돌아올 악행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동정하고 또 동정하자. 외면에 드러난 권력에 의해 밀렸다고 학습된 패배의식에 함몰될 필요는 전혀 없다.
왜 자신을 처음부터 약자로 만들어야 하는가.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주어진 삶의 시간 안에 모두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개수가 아니다. 상대는 가해자라는 이유로 동정의 대상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 나를 궁지에 몰았다는 이유만으로, 불행에 빠뜨렸다는 이유만으로 상대의 고통과 불행의 원천지로서 동정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이게 가능해지면 당신은 자유로워진다. 이게 가능해지면 당신의 시점은 다람쥐에서 독수리의 지위로 격상될 수 있다. 누군가를 동정할 수 있을 때 당신은 비로소 자신을 놓아줄 수 있게 된다. 자책과 피해의식의 늪에 빠진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 그때 비로소 사회생활의 생존자가 될 수 있다. 프로가, 된다.
지금까지 한 말은 틀릴 수도 있다.
자기 확신에 이를 때까지 엄수한다고 해도 프로가 된 환희에 차오르지 않을 수도 있다. 관계와 소통에 있어서 일정한 경지에 이른다고 그것을 프로페셔널하다고 부르는 것도 난감한 노릇이다. 무절제한 것들을 무시하고 동정의 방향을 바꾸는 것만이 프로의 절대 요건이 되는 것도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이를 통해 초연함과 평정심에 이르고 이를 통해 관점을 바꿀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소소한 자기만족에 이를 수 있다는 점에서는 진실이다. 내가 그렇게 경험했으므로, 확언할 수 있다. 신경 쓸 것 많은 세상에서 적정선의 무시와 동정의 시도를 통한 평정심의 소환은 개인의 세계와 타인과 집단의 세계 사이에 짙은 선을 긋는다. 개인의 잠재적 영토를 확장시킨다. 여유를 적극적으로 쟁취하게 하고, 시야를 넓히며, 선택의 질을 향상하고, 자세와 억양에 자신감을 불어넣는다. 그렇게 평정심으로부터 프로페셔널은 완성을 향한 심지에 불을 붙인다. 능력 없는 태도를 통해 남의 인생에 무임승차할 이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지금 흥분해 있는가. 프로가 되고 싶다면 일단 거친 호흡부터 다스려라.
editor's pick
영화_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노아>
자신의 상황이 별 것 아니라는 생각은 평정심의 소환에 도움을 준다.
주인공 노아(러셀 크로우)는 보이지 않는 신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눈앞에 시퍼렇게 살아있는 가족을 죽여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당신의 상황은 이보다 더 심각할 수 있는가.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93933
음악_ 글렌 굴드의 <Glenn Gould... And Serenity>
글렌 굴드는 이름만 알다가 최근부터 듣게 된 천재 피아니스트다.
첫 곡인 Bach: Concerto In D Minor After Alessandro Marcello, BWV 974 - 2. Adagio는
다양한 영화에 수록되어 어떤 대사보다 더 명징한 이미지를 남겼다.
바흐, 브람스 등 그만의 피아노 선율로 해석한 다양한 음악가 등이 있지만
이 앨범엔 평정심을 저절로 소환할만한 잔잔한 곡들로 주로 채워져 있다.
https://itunes.apple.com/ca/album/glenn-gould...and-serenity/id158957805
책_ 김훈의 <풍경과 상처>
가장 최근에 읽은 작가 김훈의 저서이다.
<칼의 노래>, <남한산성>, <흑산> 등 소설로 주로 알려진
그의 벼린 단어와 문장들이 대한민국 강토를 휩쓴
작가의 시선과 어우러져 장엄한 굿판을 벌인다.
상처 받은 인간과 상처 받은 풍경의 경이로움을
프로의 글과 프로의 시선으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