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 석판처럼 느껴졌다
아이패드가 바꾼 내 인생
-이건 실화다. 아이패드가 생긴 후 꿈꿔온 글을 쓰기 시작했고 2년 후 소설 신인상을 거머쥐었다.
몇 년 전 일이다. 아이패드 1이 나오고 좀 지난 시기였다. 회사에서 선착순으로 준다길래 손들었다. 그렇게 아이패드 1이 생겼다. 무거웠다. 신기하기도 했다. 기존 노트북에서 단순히 키보드를 뗀 게 아니었구나. 책받침만 한 아이폰처럼 보이기도 했다. 해상도도 그렇고 앱과 UI의 디자인도 동일하고. 서피스 2가 나오는 시점에서 웬 아이패드 1 이야기나 싶겠지만, 태블릿 PC 시장이 팽창했다 한들 얇고 평평한 디자인은 어디 하나 달라진 게 없다. 더 밝고 더 빠르고 더 예뻐졌다고 광고하지만, 다시 봐도 내 눈엔 얇고 평평한 커다란 아이폰의 다양한 버전일 뿐이다. 그리고 이 아이패드는 내 인생을 바꾸었다.
가장 먼저 시도한 건 잡지 보기였다.
잡지에 대한 판타지가 있었다. 글과 그림(사진)이 만들 수 있는 가장 완성도 높은 출판물이라는 오랜 믿음이 있었고 이를 만드는 이들에 대한 경외감 또한 식지 않고 있었다. 화려한 사진과 유려한 글들이 시각적 탐욕을 충족시키고 지성과 성찰의 축을 견고히 해주며, 변화가 시작되는 지점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끊임없이 제공해주는데 이만한 게 있을까 싶었다. 아마 나 자신이 사람들이 요구하는 부분을 앞서 파악하고 새로운 반응을 이끌어내야 하는 광고계에 몸담고 있다는 이유도 한몫했을 테다. 사보고 빌려보고 커피숍에서 훑어봐도 평소 주어진 시간 내 볼 수 있는 잡지의 수란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아이패드는 모세가 여호와에게 받아서 가지고 내려온 십계명 석판처럼 느껴졌다.
수많은 표지가 화면을 뒤덮고 있었다.
지큐, 보그, 엘르, 코즈모폴리턴, 탑기어, 인터뷰, 브이, 타임, 이코노미스트, 블룸버그 비즈니스 위크 등 패션, 경제, 시사, 자동차 등 다양한 장르의 주간지, 월간지, 계간지가 쏟아지고 있었다. 당시는 태블릿 환경으로 진입하는 초기라서 초판은 무료 버전으로 제공되고 있었다. 국적을 뛰어 다양한 버전의 잡지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은 과거 해외 잡지 코너에서 가격만 보고 돌아서던 때를 생각하면 감개무량한 변화였다. 또 하나의 특별한 점은 일부 VIP에게만 제공되거나 한정적으로만 전해지던 럭셔리 브랜드에서 내놓은 매거진을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앱스토어에서 검색만 할 수 있다면 무궁무진했다. 인기도와 출시 시기를 넘어 무엇을 검색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그만큼 방대했기 때문이다.
아이패드 16기가 용량이 금세 소진되었다.
지우고 다운로드하고 지우고 다운로드하는 과정이 반복되었지만 이 정도 번거로움은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 수 있는 대가 치고는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벤틀리 브랜드의 새로운 감각과 노력을 알게 되었고, BMW가 얼마나 새로운 디지털 환경에 적응하려고 다양한 시도를 하는지 보게 되었으며, 광고가 더 이상 눈이 아닌 터치와 재생을 통해 오감을 자극하려는지 깨닫게 되었다. 두렵기까지 했다. 태블릿 PC 보급이 커지고 이러한 방식으로 출판물을 소비하는 행위에 익숙해진다면 종이책 시장, 아니 종이책으로 세워진 세계가 완전히 끝나버리는 건 아닐까 하고. 디지털 매거진의 매출이 오프라인 매거진의 매출을 이미 뛰어넘었다는 뉴스가 들리고 있었다.
다양한 글과 사진을 보고 모으다 보니 만들고 싶어 졌다.
애초 가공의 세계를 글로 세우고 싶다는 생각은 잔에 넘치고 있었다. 고정된 장소의 데스크톱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일일이 펜과 종이로 메모하며 상상의 조각을 모아두기엔 귀찮았다. 어디서든 제대로 쓰고 어디서든 제대로 저장해서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었다. 노트북이라는 기존 발명품이 있었지만 100만 원 대를 다시 고려하기엔 지금 데스크톱도 쌩쌩했다. 그즈음 회의실엔 태블릿 키보드로 회의록을 작성하는 풍경이 빈번했다. 키보드만 사면 되는 거였다. 로지텍 브랜드에 10만 원 미만으로 있었고 그 정도 투자는 아쉽지도 아깝지도 않았다.
태블릿 키보드가 장착되니 생각은 글이 되어가고 있었다.
집필에 가속이 붙었다. 간혹 익숙지 않은 자판으로 인해 반 페이지 분량이 날아가는 사고도 있었지만, 첫 경험이란 늘 일정한 분량의 서툼이 수반되기 마련이니까 다시 쓰면 그만이었다. 그 해 여름밤을 태블릿 키보드와 함께 보냈다. '긴 글 쓰기'를 위한 다양한 앱을 찾아보긴 했지만 생각의 매듭도 제대로 지어지지 않은 세계를 구획된 템플릿 안에 가두는 게 마뜩하지 않았다. 기본으로 설치되어 있는 메모장이면 충분했다. 자판만 겨우 보일 듯한 최소한의 불빛으로 채워진 거실 창가에서 손은 쉬지 않았고 아이패드 화면은 꺼지지 않았다. 그렇게 17일 만에, 어느 광고회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자살과 타살이라는 소재를 다룬 중편 분량의 이야기가 완성되었다. 계약을 맺고 전자책으로 출판되었고, 인터파크를 중심으로 한동안 1위에 올라 있었다.
전자책 리더기가 필요했다.
아이패드엔 ibooks라는 앱을 활용할 수 있었지만 내가 낸 책은 지원되지 않았다. 인터파크에서 내놓은 전자책 리더기 앱을 따로 다운로드해야 했다. 오프라인 서점에서 한 권을 들고 나와 지폐 한 장으로 결제하던 과정과는 달랐다. 번거롭긴 했다. 서점 앱을 다운로드하고, 리더기 앱도 다운로드하고, 아이폰, 아이패드 등 가지고 있는 기기마다 해줘야 했다. 종이책만큼의 질감이나 서체에서 전해오는 단아함과 행간에서 전해오는 긴장을 그대로 옮기기엔 아직 역부족이었다. 아마 종이와 알루미늄의 차이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스으윽 손가락이 화면을 지나치면 그렇게 스으윽 아이패드의 책장도 넘어갔다.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머쓱했다. 비문도 많이 보였다. 하지만 첫 소설이었고, 종이도 아닌 아이패드로 넘기고 있었다. 그로부터 2년 후, 나는 외모지상주의와 대량학살을 다룬 이야기를 썼고 그 소설로 신인상을 받았다.
난 그저 회사에서 지급되는 아이패드를 하나 얻었을 뿐,
그걸로 원하는 잡지를 앱스토어에서 실컷 다운로드해서 보다가, 태블릿 키보드를 통해 그 안에 있는 메모장에 어떤 이야기를 썼을 뿐이고, 그 이야기가 담긴 전자책을 출판해 앱을 다운로드해서 봤을 뿐이다. 신인상은 객기가 낳은 작은 성취였을 뿐이다. 이를 통해 백만장자가 되어 태블릿 PC 브랜드를 인수하거나, 조인성이 나오는 드라마 같은 출판사 사장이 되었다면 좋았겠지만...... 신은 거기까지 허락해주지는 않더라. 쩝.
모두가 태블릿 PC의 잡지와 메모장으로 인생을 바꿀 수는 없다.
아이폰 전에도 휴대전화는 있었고, 아이패드 전에도 노트북은 있었다. 좋은 도구는 목적에 다다르는 시간을 줄이고 그 성과를 높여줄 수 있지만 목적 자체까지 설정해줄 수는 없다는 게 내 지론이다. 스마트 기기란 결국 과정의 문제지, 목적과 결과의 문제는 아니란 말이다. 많은 작가들이 어떤 '기기'를 이용하는 세상에서, 아직도 온몸으로 종이 위에 펜을 밀 어쓰며 역작을 하나하나 완성시키는 김훈 작가를 보면 스마트와 창작 행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갸웃거리게 된다.
결국 심지에 불을 붙이는 당사자는 자신일 수밖에.
스마트라는 수식어가 붙은 다양한 기능의 기기는 결국 인간이 원초적으로 즐기고 염원하던 행위들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해줄 뿐이다. 마치 돈이 그런 것처럼. 어릴 적 읽었던,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에는 쉽게 잊히지 않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금목걸이를 한 채 굶어 죽은 사람의 이야기. '어머 이건 사야 해.'라는 심정으로 6개월 카드를 긁었다가 몇 주 후 장롱 한구석에서 숨을 거두는 스마트 기기들이 각자마다 있을 것이다. 진정 스마트 라이프를 원한다면, 기기가 아닌 자신의 욕망이 원하는 방향 먼저 점검해야 할 것이다.
editor's pick
영화_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그래비티>
우주만큼, 눈에 보이면서도 믿어지지 않는 세계가 또 있을까.
빛과 먼지로 가득 찬 그곳에 더 가까이 다다르고
생존하기 위한 최상의 기술력이 모두 녹아있는 우주선에서 멀어진 순간,
인간은 그동안 가장 잊고 지냈던 기억과 마주하게 된다.
우주선은 결코 중심에 있을 수 없다.
인간이 자신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기 위한 도구일 뿐.
마치 주변에 즐비한 스마트 기기들처럼.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47370
음악_ 라디오헤드의 <OK COMPUTER>
1993년 <Pablo Honey> 이후 라디오헤드가 내놓은 앨범 중
가장 찬사를 받은 앨범이다.
모두가 각자의 이유로 <OK COMPUTER>를 좋아하지만
내 경우엔 로미오와 줄리엣 OST에도 수록되었던
‘Exit Music’ 때문에 이 앨범을 좋아한다.
오래전부터 글 쓰며 정말 많이 들었다.
몽환적이며 완전히 채워질 수 없는 흐느낌으로 가득하다.
https://itunes.apple.com/us/album/ok-computer/id696736813
책_ 에릭 슈미트의 <새로운 디지털 시대>
‘사람, 국가, 비즈니스의 미래를 다시 쓰다.’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구글 회장 에릭 슈미트의 이 책은 ‘인터넷은 인류가 만들어놓고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PC 한 대로 금융 네트워크를 마비시키고,
휴대폰 한 대로 원격 폭파를 할 수 있는 세상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늘 그렇듯, 문제는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