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닮아 사람 참 잘 죽이는 딸에 대하여. 발레리나

렌 와이즈먼 감독. 발레리나

by Glenn

한 아이를 키우려면 동네 사람들 모두의 힘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협업 없이 한 인간의 온전한 성장은 불가능한다. 아무리 수많은 도움을 받고 자라도 인간은 태생부터 결여 투성이다. 적절한 도움을 받지 않는다면 더 나은 결과를 가늠하기 어렵다. 작은 인간을 언제까지 어떻게 돌볼 수 있는가. 아무도 모른다. 몸이 커졌어도 평균의 성숙한 태도를 지니지 못한 성인이 너무 많으니까. 아이뿐만 아니라 인간 생애 전체를 봐도 다수의 힘은 필수적이다. 이브(아나 데 아르마스)의 아빠도 의견이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저마다 다른 신념을 지니고 있고 혼자 힘으로 잘 안 되는 게 당연하니, 그래 이건 운명.. 운명 비슷한 걸 타고났다고 치자.. 이런 식으로 치부하게 된다. 킬러의 딸이니까. 킬러라니. 사람 잘 죽이는 게 유전이라니. 이브도 자신을 붙잡고 무리로부터 아빠와 탈출하려고 나설 때까지 특정 집단에 의해 길러졌을 것이다. 음식도 나눠 먹고 말과 글도 배우고 자의든 타의든 동네 사람들 도움 좀 받았을 것이다. 이브의 경우가 보통사람과 좀 다르다면 동네로 돌아와 그들을 모두 쏘고 베고 찌르고 불살라 죽였다는 정도다.


이브가 연쇄살인 미치광이라서 이런 게 아니다. 킬러의 피를 이어받은 이브는 어릴 적 부모가 모두 죽는 극단적 사건을 겪는다. 그러다 어쩌다 개를 사랑하는 전설의 청부업자 존윅과 같은 아카데미에서 수학한다. 존윅의 사람 죽이는 자태가 고혹스럽긴 하지만 거긴 발레교습소가 아니었다. 이브는 거기서 무대가 피로 젖을 때까지 발레를 연습하고 목표로 한 모든 이들이 피로 젖을 때까지 살인을 연습한다. 마치 아이돌 연습생이 데뷔조를 열망하듯 자신은 준비되었다고 원장님에게 따지기도 한다. 원장님도 알고 있었다. 이브가 존윅에게는 못 미쳐도 실전 임무를 맡길 정도는 되었다는 것을. 이브는 기뻤다. 자신이 잘하고 인정받으며 열심히 한 과목을 제대로 실전에 적용할 수 있어서. 이브는 여기 처음 왔을 때 죽은 아빠의 피가 묻은 어린아이였다. 이제는 수천 가지 방법으로 상대를 죽일 수 있는 존윅 워너비 프로 킬러가 되었다.


존윅 시리즈와 이어지는 단독 영화의 주연이니 이브의 실력은 존윅이 보증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실제로 존윅(키아누 리브스)에게 몇 대 터지기는 하지만 이브의 학살 의지를 확인하기 위한 테스트였다. 애벌레였던 이브는 이제 발레리나처럼 우아하게 점프하는 나비가 되었다. 특히 단검을 던져 적들에게 다트핀처럼 꽂을 때, 스케이트날을 휘두르며 열심히 적의 살을 찢을 때, 화염방사기 성능에 만족하며 멀리 있는 적들을 초벌구이하듯 불사를 때 이브는 즐기고 있었다.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행위에 몰입하고 있었다. 하늘나라에서 바라보는 아빠는 만족하고 있을까. 어이구 사랑스러운 우리 딸, 아빠 닮아서 사람 참 잘 죽이네... 아빠 없이도 참 잘 컸구나 기특한 것... 이러고 있을까.


자신을 키워준 마을 전체를 상대로 진정한 킬러로 검증되기 위한 실전 테스트를 하는 것 같았다. 얼마나 존윅과 더 비슷할 수 있는가. 전설의 존윅에 버금가는 실력으로 독립적인 브랜딩이 가능할 것인가. 이브는 죽이면 죽일수록 액션의 격이 줄고 매끄러웠으며 망설이지 않았고 숨 쉬듯이 죽이고 또 죽였다. 원장님 말도 안 들어서 목숨이 간당간당했고 존윅한테도 잘 보여야 하고 아빠 복수도 겸사겸사 치러야 했다. 자신처럼 불행하면 안 되는 어린아이도 구해내야 하고. 하지만 제때에 아이 눈을 가려줄 사람도 없고 이브의 살인은 아이의 기억에 각인될 정도로 강렬했다. 이쯤 되면 다시 궁금해지는 게 킬러 아빠의 교육관이다. 이브의 천성과 재능을 살려 자신 같은 킬러로 키우고 싶었을까. 지금 이브의 삶은 결국 두 개의 집단에 의해 프로그래밍된 건데 이브는 자기가 타고난 것을 넘어 자기가 진짜 무엇을 원하는지 알 기회가 있었을까. 타고나고 좋아하고 잘하고 집중할 수 있는 어느 분야를 선택하고 전문적인 역량을 기르는 것은 인생의 중요한 축인데 이브도 그저 남들이 정해준 길을 잘 가는 그저 그런 인생인 것일까. 이렇게 자라게 하려고 아빠가 목숨 버려가며 이브를 구한 걸까. 이브도 이브 아빠도 존윅도 원장도 이브 앞에서 바스러지던 적들도 참... 측은하고 피곤하다.


*본문의 '원장'은 이해를 쉽게 붙인 말, 공식 명칭은 암살집단 루스카 로마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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