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X복수X망각. 우연과 상상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우연과 상상

by Glenn

행동 원리를 몰라 경계했단 표현이 맞겠죠


질투_친한 동료가 전애인과 사귀는 우연과 상상. 메이코와 츠구미와 카즈아키

복수_최고의 작가를 최악의 변태로 만드는 계획과 변수. 나오와 사사키와 세가와

망각_첫사랑을 못 알아보는 망각과 나비효과. 나나와 모카


1.

메이코는 친한 동료 츠구미에게 새로 만난 남자 이야기를 한다. 너무 생생하게 묘사해서 마치 셋이 같이 있다는 느낌까지 들 정도. 메이코는 당장이라도 그 남자와 폭발적인 감정에 휩싸여 운명과 기적을 엮어 평생의 언약이라도 맺을 기세다. 하지만 메이코와 헤어진 후 츠구미의 표정은 무겁다. 메이코의 새 남자는 츠구미의 전남친이었기 때문에. 츠구미는 전남친 카즈아키를 2년 만에 찾아간다. 카즈아키는 당황하며 츠구미를 밀어내려 하지만 사랑했던 감정은 여전히 진하게 남아있다. 텅 빈 사무실에서 둘은 끌어안는다. 재벌과 자고 싶었던 츠구미의 기이한 바람으로 헤어졌던 둘이었다. 상대를 사랑하면 상처를 주는 타입이라는 츠구미의 자책과 함께 짧은 재회는 거기서 끝난다. 얼마 후 메이코와 츠구미가 있는 곳에서 카즈아키가 지나간다. 전남친과 친한 동료를 앞에 두고 츠구미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입을 다물면 메이코와 카즈아키는 한동안은 뜨거운 연인 관계로 이어질 것이다. 전남친 팩트를 오픈한다면 파국이 덮치며 셋 사이의 공기를 찢어버릴 것이다. 츠구미는 공익적인 선택을 하는 듯 보이지만 그게 메이코나 카즈아키를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한 자리에서 소중한 두 사람을 동시에 잃어버리는 손익계산에서 망설였을 뿐. 나는 인간이 실수에서 배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두 번째 실수를 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냐의 차이일 뿐. 그리고 실수는 대부분 실수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2.

나오는 30대에 대학생이 되었고 무리에 섞이지 못한다. 그런 빈틈을 노린 사사키와 몸을 섞을 뿐. 사사키는 부족한 학점을 고쳐주지 않은 교수 세가와에게 복수할 계획을 세운다. 세가와가 문학상을 받은 소설을 가지고 나오에게 교수와 성적 스캔들을 일으키라고 유도한다. 사사키 같은 양아치가 책 모서리에 맞아 죽어야 해피엔딩이겠지만 사사키의 몸이 좋은 나오는 시키는 대로 세가와에게 접근한다. 몰래 녹음을 하며 세가와에게 성적 암시를 유발하고 음란한 대화를 유도하려 최대한 자연스러움을 유지하며 온갖 시도를 다한다. 하지만 세가와는 미동하지 않는다. 의도를 간파한 게 아니라 세가와는 그런 인물이었다. 애초 세가와의 글을 좋아했던 나오는 세가와의 품성에 굴복하며 범죄의도를 자백한다. 세가와는 역시 반응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소설에서 성애적 묘사를 나오가 낭독한 게 보이스파일로 남았다는 점에 기뻐한다. 그걸 줄 수 있겠냐고. 나오는 고마움과 사죄의 의미로 기꺼이 전하기로 한다. 속이려던 자와 속지 않은 자, 그리고 의외의 거래. 에어드롭으로 넘겼다면 깔끔했을 것이다. 서로에게 좋은 이미지가 쌓인 채 새로운 연인 관계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정직한 자백과 훈훈한 대화로 마무리되었지만 상황은 끝까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세가와는 직장을 잃고 나오는 가족을 잃는다. 오랜만에 만난 나오는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사사키에게 갑작스러운 키스를 한다. 나오는 사사키가 무엇에 약한지 잘 알고 있었다. 자신도 그렇게 이용당했으니까. 이제 사사키가 잃어버릴 차례였다.


3.

모카는 동창생 모임에 간다. 대부분 모카를 모르고 모카도 관심이 없다. 모카는 길에서 나나를 지나치고 쫓아가고 운명을 다시 만난 듯 반가움을 표현한다. 20년 전 첫사랑과 다시 만난 순간이었다. 나나는 반가워 어쩔 줄 모르는 모카와 같이 반가워하며 자신의 집에서 잠시 차를 마시며 이야기하기로 한다. 모카는 싱글이었고 나나는 두 아이와 남편과 커다란 집도 있었다. 다과를 준비하며 나나와 모카는 알게 된다. 둘은 서로를 전혀 모른다는 것을. 첫사랑도 아니고 동창도 아니며 이름도 성도 모르는 완전 타인이었다는 것을. 잘못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한 모카와 그런 모카에게 느낌 상 아는 사람인 줄 알고 맞춰주었던 나나의 합작품이었다. 거대한 해킹과 데이터 누출로 디지털 연락이 불가능해진 시대, 둘은 흐릿한 기억과 짐작만으로 서로를 완전히 오해했고 긴 대화까지 나누었으며 이제는 실망과 자책만이 남은 상황이었다. 이런 소재로 영화를 여기까지 만들 수 있다니. 이 에피소드는 다분히 연극적이었다. 그리고 망각과 실패에서 끝나지 않는다. 둘은 서로의 상황과 실수를 이해하려 애쓰고 사과하며 과거를 복기한다. 실제 잊고 살던 것이 과거의 타인뿐만 아니라 그들과 연결되었던 현재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안정된 가정이었지만 내가 없었다. 20년 동안 첫사랑을 못 잊었다고 했지만 현실의 결과 아얘 잊고 지낸 것과 다르지 않았다. 방금 처음 만난 모카와 나나는 인생이라는 연극 위에서 잠시 새로운 각본을 쓰기로 한다. 서로의 과거가 되어주기로 한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우연과 상상에 세 개의 에피소드를 전시하며 인간이 무엇을 선택할 수 있고 선택할 수 없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과거에 그대로 머물고 있는 사건은 없다고 알려준다. 과거의 사건이 있다면 현재의 사건으로 연결되어 계속 이어질 수 있다고. 그것이 어떤 형태의 사랑이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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