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의 나비효과

영화 달콤한 인생

by 백승권

검색한다. 명사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이라고 나온다. 꼬리를 물어본다. 특별히 관련된 개인사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 누군들 공정하고 치우치지 않은 생각을 할 수 있나? 싶다. 신조차, 기껏 만들어놨는데 말 안 듣는 인간들로 가득 찬 세상을 재부팅하려고 물로 쓸어버리고, 아들까지 보내 십자가에 대신 매달지 않았나. 이건 공정한가? 전혀 치우치지 않았나? 하물며 인간은? 편견이란 단어를 만들었다는 자체가 인간들이 얼마나 공정하지 못하고 치우칠 수밖에 없는 존재인지 반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더 심한 편견의 부작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만든 단어 같다. 인간만큼 편견에 사로잡혀 시간을 낭비하고, 편견에 사로잡혀 동족을 몰살하려는 족속은 없으니까. 평생 이상적인 균형을 획득하지 못하는 존재, 인간은 편견 그 자체다.

하여, 완전한 선택과 완벽한 결정은 없다. 생을 구성하는 모든 순간순간이 편견으로 인한 ‘한쪽으로 치우친’ 선택과 결정으로 채워져 있다. 과정이 이러니 결과 또한 온전할 리 없다. 편견은 편견에 부합하는 결과를 도출하고 다시 편견에 빠진 선택과 결정으로 이어지는 연쇄 반응을 낳는다. 편견의 인간들이 벌이는 편견의 사건들로 채워진 편견의 세상. 애초 벗어날 수 없고, 의지가 있다 한들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모두와 모든 부분이 그러하니까, 우린 모두 기울어진 틀 안에서 기울어진 행동을 통해 연명하고 있다. 그걸 바로 잡으려는 노력 또한 기울어진 상태로. 어차피 희망은 없다는 하나마나 한 소리를 하려고 이렇게 길게 늘어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바닥이 기울어진 상태에서 똑바로 보기 위해서는 반대방향으로 기울여야 한다. 움직여야 한다. 그래야 평형을 유지할 수 있다. 이런 행동은 발을 디딘 곳이 기울어져 있다는, 편견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인지 하에 가능하다. 인정하지 않고서는 움직이기 힘들다. 편견을 받아들이는 일이 편견을 극복하는 시작점인 것이다. 이것은 마치 자신이 병신이었구나 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만큼 쉽지 않을 것이다. 내가 가진 일부 의견이 비뚤어져 있었다니. 이를 인정하는 지혜는 시간과 경험과 반드시 비례하여 얻어지지 않는다.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지금껏 지켜온 세계관과 자부심을 가졌던 일들이 평가절하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덮친다. 그게 뭐 어때서? 나 원래 병신이었어.라는 멘틀이 누구에게나 장착되어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편견의 부작용을 상쇄시키기 위해서는 편견에 대한 자각 과정은 필요하다. 이게 거쳐지지 않는다면, 반복되는 실수를 막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결과들에서 영영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과정이 편견이었으니까, 편견은 그만큼 공기 같은 존재였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많은 결과들을 의도와 예측에서 벗어나게 하고 있었으니까. 길고 장황하게 썼지만 하고 싶은 말은 단 하나다. 이건 마치 영화 달콤한 인생에서 백 사장(황정민)의 수하 오무성(이기영)이 선우(이병헌)에게 했던 대사와도 맥락을 같이 한다.

“잘. 못. 해. 음

이 네 마디야

네 마디만 하면 적어도 끔찍한 일은 피할 수 있다.

잘. 못. 해. 음

딱 네 마디다.”

선우가 이후 겪는 모든 비극의 시작점은 신민아를 처음 본 순간도, 업소에서 난동 부리는 백사장 일당을 해치운 순간도 아니었다. 저기서부터였다. 이렇게까지 나오시는 걸 보니 내가 뭘 잘못했긴 했나 보네요. 미안.이라고 했으면 달콤하진 않아도 목숨은 보존하는 인생이 되었을 테다. 하지만 영화 주인공인 선우는, 우리의 잘 생기고 싸움 잘하고 슈트도 잘 어울리는 선우 씨는 코웃음을 친다. 뭐래 이 병신이, 조까 꺼져의 태도로 대응한다. 편견과 편견의 대립, 이후 근육과 근육이, 연장과 연장이, 총알과 총알이 격돌한다. 그전에 선우는 한 손을 잃고 흙더미 속에 무참히 매립된다. 영화적 재미를 통해 극단까지 밀어붙였지만 현실과의 괴리감이 그리 크지 않다. 선우에게 주어진 선택지에 대해 다른 경우를 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탈출한 선우에 대해 강 사장(김영철)의 대사는 조직의 형태에 몸담고 있다면 쓰디쓸지언정 공감대를 형성한다.

" 몇 년 전 꽤 똑똑한 친구 하나가 제 밑에서 일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친구에게 심부름을 하날 시켰는데 사소하게 생각했었던지 실수를 저질러버렸어요.

뭐.. 지금 생각해보면 대단한 실수도 아니었습니다. 가볍게 야단치고 끝날 일이었죠.

근데 그 친구 분위기가 이상한 거예요 자신의 잘못을 인정을 하지 않는 거예요.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거죠.

아닐 수도 있어요. 내 착오일 수도 있는 거죠. 한데, 조직이라는 게 뭡니까?

오야가 누군가에게 실수했다고 하면 실수한 일이 없어도 실수한 사람은 나와야 하는 거죠."

이게 말 같지도 않지만, 특히 마지막 문장은 꼰대 질의 집대성이지만 이런 판타지 같은 의식을 가진 자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너는 실수하지 않은 것일 수 있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네가 실수했다고 인정했으면 좋겠다. 또 하지만 너는 인정하지 않으니 나는 너를 용서할 수 없다. 넌 사형이다. 이런 식. 먹이사슬의 상위에 있는 자가 하위에 있는 상대의 관점마저 조종하려 든다. 선우는 자신의 입장에 확신이 없지만 이러한 암묵적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배신감을 느낀다. 편견과 편견이 엇갈리는 순간 진실은 격렬한 행동으로 드러난다. 선우는 울부짖으며 총을 겨눈다. 변론의 여지를 주지만 이미 분노로 잠식된 선우에겐 먹히지 않는다. 강 사장은 결국 가슴을 움켜쥔 채 쓰러진다.

영화 달콤한 인생을 통해 보면, 편견은 오해를 낳고 오해는 잘못된 판단을 낳고 잘못된 판단은 결국 패망을 자초한다. 물론 영화 한 편만으로 모든 편견의 나비효과를 일반화시키긴 무리다. 말하고 싶었던 것은 편견의 연쇄작용에서 쉽게 벗어날 수는 없지만 개선의 기회는 지속적으로 주어진다는 점이다. 단 한 번의 편견으로 절대적으로 그르치는 경우는 드물다. 편견은 관점이고 입장이며 상황에 따라 다르게 대응할 여지를 확보할 시간이 주어진다. 균형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지속적으로 무시한다면 후폭풍은 그리 가볍지 않다는 점을 영화는 보여준다. 다양한 상황에 맞는 편견의 개선 여지를 일일이 들 순 없겠지만, 아까 언급했듯이, 순간엔 받아들이기 힘들더라도 ‘내가 잘못했음?’이라는 자문만 기저에 깔아 둔다면 소중한 자존감, 또는 생명을 길게 존중받을 수 있지 않을까. 편견에 빠져 있는 동안엔 편견에 빠져 있는 줄 모른다. 하지만 이건 혹시 나만의 편견이 아닐까 여기는 순간, 우리는 균형의 가능성을 확보하고 개선의 동아줄을 붙잡을 수 있다. 편견의 나비효과에 의해 육체적 정신적 상해를 피하고 싶다면, 가장 먼저 자신을 의심하자.


이 글은 계몽의 의도가 아니다. 사견이다. 편견에 대한 생각은 각자 다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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