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플 룸

고문기술자

by 백승권

작은 방.
불이 꺼지지 않는 방.
한번 들어가면 살아 나오지 못하는 방.
중력과 시간이 작용하지 않는 방.
이성과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 방.
숨을 쉴 수 없는 방.
질문만 있고 대답은 없는 방.
대답을 허용하지 않는 방.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 방.
한없이 어두운 방.
여러 명이 있어도 아무도 없는 방.
무기가 없어도 서로를 해치는 방.
투명하지만 누구도 안을 볼 수 없는 방.
소리는 들리지만 간섭할 수 없는 방.
계급의 방.
각자의 보이지 않는 면적이 철저히 구획되어 있는 방.
비밀의 방.
아무도 듣지 못하고 누구도 보지 못하지만
모든 것이 공유되고 사라지는 방
입구는 있어도 출구는 없는 방
생각이 허용되지 않는 방.
선택이 허용되지 않는 방.
의견이 허용되지 않는 방.
단두대.
목을 내밀고 칼이 날아오기를 기다리는 방.
어서 살과 뼈가 몸통과 분리되어
모든 것이 끝나버리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는 방.
날아오는 주먹을 피할 수 없는 방.
날아오는 발길질을 막을 수 없는 방.
모두가 알고 있는 방.
모두가 들어가 본 적 있는 방.
하지만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달라
모두에게 다른 기억의 방.
모두에게 다른 슬픔의 방.
모두에게 다른 공포의 방.
모두에게 다른 어둠의 방.
모두에게 다른 두려움의 방.
모두에게 다른 경악의 방.
모두에게 다른 한계의 방.
모두에게 다른 비명의 방.
모두에게 다른 피투성이의 방
모두에게 다른 죽음의 방.
모두에게 다른 무덤의 방.
모두에게 다른 압력의 방.
모두에게 다른 화염의 방.
모두에게 다른 익사의 방.
모두에게 다른 고문의 방.
모두에게 다른 시련의 방.
모두에게 다른 절멸의 방.
모두에게 다른 상처의 방.
모두에게 다른 살인의 방.
처음부터 없었으면 좋았겠지만
처음 누군가 그 방을 발견했을 적부터 존재했던 방.
하지만 지금과는 달랐던 방.
처음에 그 방은 한쪽 벽은 유리로 세워져 있고
한쪽 벽은 보라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던 방.
그 방의 유일한 통로인 하나의 문이 보라색으로 칠해져 있던 방.
보라색이 도드라져 보여서 퍼플 룸으로 불렸던 방.
하지만 지금은 누구도 그 방을 퍼플 룸으로 부르지 않네.
그동안 그 방을 드나들던
셀 수 없는 이들의 피와 살점으로 물들어
기존의 색을 알아볼 수 없게 되었으니까.
그동안 그 방을 드나들던
셀 수 없는 이들의 악몽과 비명으로 물들어
기존의 이름을 잃어버렸으니까.
그동안 그 방을 드나들던
셀 수 없는 이들의 슬픔과 고통으로 물들어
기존의 기능을 잃어버렸으니까.


처음 그 방에 들어갔던 때가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하지 않아야만 살아갈 수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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