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된 감정상태

지긋지긋한 역할극

by 백승권

어쩌면 지금이 스스로 갇힌 프레임이 깨지는 순간들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내 멋대로 관음 하고 재단하고 정의했다가 이제와 그게 아니었음을 알고 나니 온갖 충격과 공포에 휩싸이는 것이다. 사물들의 물성은 애초부터 그 자리 그대로였고 해석하고 받아들인 건 나였나.
이렇게라도 여기며 넘실대는 분노와 증오의 파편이 다른 대상으로 날아가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내 발로 들어온 곳에서 내가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의 예상하지 못한 결정에 의해 흔들린다 한들 내 혐의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이다. 나는 나의 공범이고 그래서 애석하다.
더 적은 말과 더 온화한 표현과 더 활짝 웃었다면 더 인내하고 더 이해하며 더 나서지 않았다면 같은 만약의 만약 같은 약에 쩐 듯한 소리는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아무 소용없다. 이건 마치 우주와 지구가 생성되지 않았다면 나았을 걸과 마찬가지 소리다.
조금 더 시간을 버티면 체념의 시즌이 찬란하게 닥친다. 학습된 감정상태란 이래서 편리하다. 적어도 스스로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어서 기다리게 된다. 뭐가 쓸려내려가던지 바람과 파도는 지나게 되어 있고 그 후 다 쓰러진 조각들을 기워내면 된다고.
관계의 주체는 나인적이 없어서 언젠가는 고장 나기 마련이고 그때가 지금이다. 각자 최선을 다한들 간헐적으로 망가질 수밖에 없고 작동을 되돌린들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절대 그럴 수 없다. 아침에 만나 저녁에 헤어지는 노동자들에게 관계의 원점은 없다.
수십 년을 한 몸뚱이에 갇혀 산들 자신에게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타인에 대한 적응과 이해, 인정과 관용을 기대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하지만 번번이 망각하고 번번이 기습을 당하며 번번이 과거를 살해당한다. 곱씹어도 합리화해도 모두 무효일 뿐이다.
나는 이번에도 나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고 한없는 수평과 무용의 상태를 갖추지 못해 가해와 피해의 기울기를 형성하고 말았다. 지긋지긋한 역할극. 현명해지기란 매번 너무 어렵고 불가능처럼 느껴질 정도다. 언젠가 찔리지 않을 정도로 웃고 떠들고 믿어야 했다.
그걸 못해서 지금 이 몰골로 어깨와 목덜미를 늘어뜨리고 다닌다. 순식간에 배를 열리고 장기를 도난당한 걸인처럼 같은 길을 서성인다. 동정의 대상이 된다. 회복될 수 없는 자로 선언된다. 암묵적 룰에 숨통을 절단당한다. 빛을 부끄러워한다. 다른 낮을 찾는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내통하는 입과 귀가 몰래 낳는 기형의 비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