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몽, 당신들 없는 세상

장률 감독. 춘몽

by 백승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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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 없는 세상에 살고 있었다. 당신들 없는 세상에 살고 싶었다. 언어 전달과 반응은 물론 전신을 움직이지 못하는 아비를 건사하는 여자(한예리)가 없는 세상. 친구들과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쓰러져 온몸이 굳고 눈이 뒤집힌 채 입에 거품을 무는 남자(윤종빈)가 없는 세상. 북에서 넘어와 공장에서 일하다 우울해 보인다는 이유로 해고되고 반년치 임금을 지급받지 못해 매일 같이 사장이 타고 있는 세단에 90도로 인사를 하며 빌고 비는 노동자(박종범)가 없는 세상. 낮엔 당구치고 밤엔 술 마시는, 건달인지 아닌지 모르겠는 동네 건달(양익준)이 없는 세상. 이런 사람들은 겪지도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았고 영영 내가 꿈꾸고 바라는 세상에 섞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피하며 살았는지 모르겠다. 그들처럼 되고 싶지 않았고 그런 이들의 삶이 내 삶에 묻는 걸 원하지 않았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좀 더 무겁고 서글프며 멀리서 바라만 봐도 피로감이 몰려오는 풍경으로 가득한, 적막하고 누추한 삶. 그래서, 지금 나는 그들과 그렇게 다른가.

의지가 드러나지 않는 삶.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점에서 네 남녀는 닮았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하루 종일 한 몸처럼 붙어 다닌다. 네 명이 한 몸처럼 다닌다 한들 완전체를 이루는 것도 아니다. 자의든 타의든 각각의 결여를 지니고 있는 넷은 몰려다니면서도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로 서로를 내내 끌어당긴다. 마치 저렇게라도 하며 겨우 서 있고 싶은 것처럼, 넷은 한 명이 자리를 비우면 그 한 명을 찾아다니고 한 명이 사정이 생기면 그 사정을 자기 사정처럼 챙긴다. 핏줄의 대안. 넷은 그렇게 서로의 서로가 되어주며 산다. 너무 다른데 너무 어울린다. 그럼에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은 존재한다. 비밀은 경계이지만 비밀은 서로를 독립된 개체로 인정하게 만든다.

우연히 정범의 가방에서 거대한 칼을 발견했을 때, 셋은 상황의 긴박함을 발견하고 대책을 모색한다. 정범이 일하던 공장에 쳐들어가고 묘안은 없었지만 몸으로 부딪친다. 그리고 조용한 평화가 찾아온다. 익준에게 계속 찾아오는 건달은 익준을 남은 셋과의 일정한 거리를 형성한다. 과거에 무엇을 했던 지금은 아니지만 지금 익준이 어떤 사람이던 과거의 익준은 현재의 익준을 옥죄고 있다. 익준은 홀로 괴로워한다. 이 괴로움은 도움받기 어렵다. 예리가 든 보험의 액수는 병든 아비를 향한 예리의 근심을 드러낸다. 이는 살의로 표현되기도 한다. 어느 날 예리의 아비를 태운 휠체어가 가파른 골목을 홀로 내려오고 셋은 이를 멈추며 수습한다. 누가 밀었는지, 스스로 움직였는지, 자살인지 타살의 시도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예리는 말이 없고 한국에서의 삶은 고단하다. 유부남인 남자가 중국에서 바람피워 태어난 딸. 그게 예리가 알고 있는 자신의 정체성이다. 그 유부남은 지금 아무 말도 아무것도 못 하며 발가벗겨진 채 딸에 의해서만 몸을 씻을 수 있다. 종빈은 건물주, 가장 모자라 보이는데 폭력과 다른 가장 현실적인 권력을 지니고 있다. 그는 남은 두 남자처럼 예리를 좋아한다. 대놓고 만지라는 가슴도 만지지 못하며 고개를 숙일 정도로 예리를 좋아한다.

넷의 이별은 감지되었다. 영화를 보러 갔을 때, 예리는 동행한 세 남자가 부끄러웠다. 자신의 영화 취향은 존중받지 못했고 극장 예절도 최악이었으며 쫓겨나기 전에 도망 나왔다. 몸도 마음도 건강한 남자를 원하는 예리에게 세 남자는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몸도 마음도 건강한, 꿈꾸던 이미지의 남자가 눈앞에 불쑥 다가왔을 때 예리는 정신을 놓는다. 춤을 추고 몸도 마음도 건강할 것 같은 기다리던 그 남자의 오토바이를 정신 놓고 따라간다. 깜깜한 밤에 모든 것을 두고 떠나간 예리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후 넷은 셋이 된다. 예리는 사진이 된다.

풍경의 일부 같은 사람들이 있다. 타인의 시선 앞에서 모두 풍경일 수밖에 없지만, 어떤 주체보다는 정말 벽과 길, 나무와 흙, 바람처럼 풍경의 일부 같은 이들이 있다. 그들을 풍경으로 인식하고 정의하는 건 나였다. 내 시선은 늘 그들을 멀리 두고 싶었다. 변변찮아 보이는 그들에게서 나의 결함이 들킬까 봐. 춘몽은 그런 이야기였다. 결국 주변과 풍경의 일부일 수밖에 없는 나를 잠시 환기시키던 이야기. 느리게 감상하고 빨리 덮어두고 싶던 이야기. 널리 알리지 않고 침묵하고 싶었던 이야기. 누구나 다른 꿈을 꾼다. 그들의 꿈이 무엇이었건 간에 닮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도심으로 건너가고 싶어 하지 않았고 그래서 좁은 골목과 낡은 건물들 사이에서 나오지 않은 채 소외되었다. 그들과 닮고 싶지 않다. 그들이 그저 하룻밤 꾸고 깨면 잊힐, 짧은 꿈이었으면 좋겠다.





컬러 같은 감정들, 흑백 같은 기록들

연애의 허상 - 영화와 사랑에 대한 비밀과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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