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어사이드 스쿼드, 할리퀸과 조커의 사랑법

데이비드 에이어 감독. 수어사이드 스쿼드

by 백승권

미치는 게 사랑이다. 비정상. 정신이 온전하다면 사랑에 몸과 맘과 시간과 돈을 바칠 수 없다. 사랑인 척하는 이들도 있고 사랑한다면서 사랑이 아닌 이들도 있겠지만, 암묵적으로 합의한 기호와 언어와 룰이 있겠지만, 일단 사랑에 빠지면 숨기기 힘들다. 그걸 사랑이냐 아니냐로 정의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이글에서 사랑이냐 아니냐를 다루는 것은 하지 않는다. 아마 사랑하니까 저렇게까지 하는 것 아닐까, 그러니까 저건 사랑이지 않을까. 그래 사랑이다.라고 (다소 일방적인 추측이지만, 그럼에도) 전제하고 간다. 할리퀸과 조커는 사랑하는 사이라고 전제한다. 원작자와 감독에게 직접 묻지 않았고 관련 인터뷰에서 참고할만한 답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할리퀸과 조커를 사랑하는 사이라고 전제한다. 그리고 그 방식에 대해 이야기할 참이다.


수십억 인구의 사랑법을 ‘로맨틱’ 하나로 단정 짓는 것은 무자비하다. 기준이 될 수도 없다. 수십수백 년간 책과 영상이 정형화된 방식을 배포하긴 했지만, 협소하기 그지없다. 세상의 모든 운명 같은 사랑이 철천지 원수지간의 가문에 있는 10대 남녀가 첫눈에 반해 극약을 먹고 자살한다로 정의되는 것은 곱씹어봐도 무리수가 넘친다. 하지만 현실이든 픽션이든 사랑이란 요소에 극단적 선택이란 거부할 수 없는 매력포인트 같은 걸 테니. 사랑에 빠지는 남녀는 흔히 자신을 캐릭터화 시킨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이렇게 해야 된다고 세뇌시킨다. 그때까지 보고 듣고 바라던 이미지들을 체화시키려 노력한다. 극대화된 감정 속에서 예술가의 영혼에 빙의된 듯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워킹타이틀의 할리우드 영화와 노희경,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들이 도와준다. 학습된 이미지에 체화된 만큼 익숙해 보이는 사랑을 나눈다. 기뻐하는 방식과 슬퍼하는 방식, 다니는 곳과 나누는 말과 글들, 행동들, 선택들, 비슷하다. 주입된 것인지 인류의 천성인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몰려다니는 곳에서 곧잘 보이는 커플들이 사랑하는 방식은 다들 비슷해 보인다. 속내와 사정은 제대로 알 수 없지만 매달 치르던 시험처럼 정답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저게 보편적인 사랑이라고.

적어도 남자가 사랑을 고백하는 여자에게 정신분열을 일으키는 충격을 주거나, 당신을 위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여자를 절벽의 높이에서 밀어 거대한 독성 약물 통에 빠트리거나, 저 남자가 너랑 자고 싶어 하는 거 같으니 원하는 대로 해주렴 이라고 굴지 않는다. 연인이 아닌 3대를 이어온 주종관계도 이렇게는 안 한다. 데이트 폭력도 이 정도면 사형감이다. 그런데, 극단적 관계에는 그 어떤 인간 대 인간 사이의 전류보다 ‘코드’라는 것이 크게 작용한다. 남들이 뭐라든 네가 원하고 네가 원하는 걸 내가 해줄 수 있어서 내가 좋으면 그만이라는 코드. 그게 전기충격이든, 독극물에 빠뜨리든, 다른 이성을 유혹하든 상관없다고. 우리가 좋다는데 뭐가 문제야. 이런 코드.


영화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할리퀸과 조커의 사랑이다.


조커(자레드 레토)가 할리퀸(마고 로비)을 구하기 위해 기관총을 난사해 사살한 군인이 몇인지 세다 포기했다. 죽어라 꺼지라고 할 땐 언제고, 이젠 곁에 없으면 이를 가로막는 모든 이들을 다 죽이고도 모자랄 정도로 집착한다. 보통의 인류들과 정신의 원본이 다른 이라 여겨진다. 이게 아니라면 후천적 학습으로 이런 사랑법을 익힐 수 없다. 이들은 본능보다 더 본능적으로 서로를 물어뜯고 가학적으로 굴며 애정을 표출한다. 폭력보다 이들의 극단적인 방식을 대신해줄 수 있는 단어는 많지 않아 보인다. 죽일 듯이 사랑하고 이를 위해 주변의 모두를 죽인다. 미치지 않고서는 통할 수 없는 코드이자 실제로 미쳤기에 세상의 모든 부정을 무시한 채 저지를 수 있는 사랑이다.

말보다 때리는 법을 먼저 배운 어린아이 와도 같다. 그게 관심을 보이는 방식이라 여기고, 상대에 대한 이해보다 자신의 충동과 욕망을 충족시키는 게 먼저다. 폭력적으로 대해서 상대의 관심을 얻을 수 있다면 성공인셈이다. 실패는 없다. 이를 실패라고 인정하는 이들은 모두 죽여버리면 되니까. 정신과 의사와 정신병 환자로 시작된 관계. 환자는 자신을 을의 위치로 여긴 적 없고, 의사는 그런 환자에게 정신없이 빠져 든다. 그가 추구하는 것이 세상의 멸망이고 그의 모든 방식파괴와 살육이라도 상관없다. 극단으로 치달은 개인의 감정 앞에서 세상의 도덕과 규율은 하찮다. 그가 원하니까 나도 원한다. 그뿐이다.

시종일관 조증에 걸린 듯 눈치 없는 농담과 비정상적일 정도의 쾌활함을 뿜어내던 할리퀸이 애잔해 보였던 한 순간이 있었다. 조커가 죽었다고 여겼을 때. 할리퀸은 생기를 잃는다. 어쩌다 뭉치게 된 동료들이 다가왔을 때 완전히 학습된 미소를 지어 보이지만 내면의 충격이 남긴 외면의 그늘까지 다 없애진 못한다. 할리퀸이 사랑에 대한 보편적인 반응을 보여준 유일한 장면이었다.

현실에서 이런 사랑이야기는 허핑턴포스트 국제면에서도 본 적이 없다. 있다면 당장 군대를 동원해 전기의자에 앉혀지지 않을까. 영화 같은 상징과 기호로 점철된 복합적 미디어이기에 이런 허구적 이미지를 끝까지 밀어붙이며 그려 낼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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