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아킴 트리에 감독. 라우더 댄 밤즈
생은 선택을 강요한다. 하나의 시간대에 하나의 공간에 있어야만 하고 하나의 역할에 집중해야 하며 그 선택이 타인의 비난에서 최대한 비껴나가 있어야 한다. 인간이 이룬 사회 내부에는 일정한 도덕률이 존재하고 감옥에 가지 않는 정도의 행위더라도 다수의 선택과 다를 경우 뒷말을 피할 수 없다. 가족이란 집단을 이룬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엄마, 남편, 아들, 남자, 여자, 동생, 형, 아내, 자식, 부모.... 너무 많다. 이것뿐이 아니다. 여기에 직업이 더해진다. 사진작가, 배우, 학생, 교수... 더해지면 변수는 제곱이 된다. 이건 마치 거미줄 사이로 비행해야 하는 나비의 신세와도 같다. 날개를 찢기지 않을 겨를이 없다. 모두가 다친다. 모든 역할은 시시각각 훼손된다. 침묵으로 일관해도 회복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은 되려 악화시킬 뿐이다. 비밀이 난무하고 밝혀진 후에도 괜찮아지지 않는다. 죽음은 사건이지만 일차원적으로 해석한다면 빈자리가 하나 늘었을 뿐이다. 각각의 가족 구성원들은 이미 커다란 구멍 하나를 지니고 살고 있었다. 얼마 전, 한 여자가 죽었다.
이사벨(이자벨 위페르). 매번 뉴욕타임스를 커다랗게 차지하는 세계적인 사진작가였다. 엄마였고 아내였으며 여자였고 인간이었다. 시간이 지난 후 그녀의 작품들로 전시회가 기획된다. 그녀의 작업실엔 그녀만 없었다. 모든 흔적이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남편 진(가브리엘 범)은 현실과 회상을 오간다. 첫째 아들 조나(제시 아이젠버그)가 엄마의 사진들을 정리하러 찾아오고, 같이 사는 둘째 아들 콘라드(데빈 드루이드)는 여전히 말이 없고 시큰둥하다. 모두 한자리에 모였지만 아무도 없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분위기. 엄마는 모든 곳에서 보였지만 만져지지 않았다. 소수만 알던 진실이 남은 자들에게 엄습한다.
교통사고로 알려졌던 그녀의 사인은 우울증세로 인한 자살이었다. 콘라드만 모르고 있었고 그녀의 동료에 의해 대중에 알려지기 직전이었다. 진실을 알리며 먹고사는 이들에게 고인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존중과 예우에 가까웠다. 숨기고 싶은 만큼 알려야 하는 심정도 이해받아야 했다. 거세게 말리지도 꼭 알려야겠다고 다투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역할 안에서 의무감을 넌지시 어필한다. 진은 아들에게 알려야 했지만 대화의 접점은 좀처럼 잡히지 않는다. 엄마의 생전 기록을 뒤지는 조나는 막 갓난애가 태어났지만 가까이 가지 못한다. 되려 과거의 여자에게 집착하고 잠자리를 갖는다. 조나뿐이 아니었다. 진에게도 다른 여자가 있었다. 새로 온 직장 동료, 아내보다 젊었고 아내보다 가까이에 있었다. 허락되지 않은 관계를 나눈 건 조나와 진뿐이 아니었다. 이사벨 또한 집을 떠나 있는 동안 동료 사진작가와 관계를 가졌다. 텍스트로만 보면 다들 하나같이 정신 나간 미친 콩가루 바람난 가족 같았다. 쓸쓸한 눈빛, 혼자를 감당하지 못하는 몸짓들, 방황하는 정신, 가족은 허울이었다. 어떤 공허도 채워주지 못했다. 돌아올 곳이었을 뿐, 그저 그뿐이었다.
이사벨의 동료가 증언한 이사벨이 겪었던 번민은 진의 상상을 초월했다. 종군 사진작가였던 그녀는 출국이 잦았고 그건 직업 이상의 자기와 삶에 대한 사랑이었다. 가족을 위해 배우를 포기했다는 남편과 엄마를 곁에 두고 싶어 하는 아이들 속에서 매번 나라 밖으로 떠나는 그녀의 표정은 어두웠다. 하지만 어느 쪽도 포기할 수 없었다. 인간과 개인과 사진작가로서 세계와 수많은 타인들과 소수인들에게 의미가 되고 싶었다. 그녀의 시도는 성공적이었고 성취엔 늘 찬사가 뒤따랐다. 가족을 제외한 모두가 그녀를 진보적인 예술가로 추앙하고 있었다. 목숨을 걸고 들이민 렌즈 속에 담긴 참상들, 그녀는 자신의 업을 고민했고 그 가치를 자문했다. 단지 유명해지려는 것인가. 만인에게 진실을 알리려는 것인가, 어떤 쪽이든 전장에서의 희생자들에 대한 무례를 무릅쓰고 저질러지는 일이었다. 예술가로서의 고뇌와 가족의 일부로서의 죄책감이 늘 휘감았다. 집에 돌아왔을 때조차 타인일 수밖에 없었다. 남편과 아이들은 매번 변해 있었고 그들이 감지하지 못하는 질서에 적응하기 위해 그녀에겐 늘 일정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누구의 탓도 아니었지만 모두가 피해를 입고 있었다. 어디로 도망치더라도 한쪽 세계는 불안했다. 타국에서의 활동을 그만두고 완전히 돌아왔을 때 그녀의 우울증세는 제어의 영역을 벗어난 듯 보였다. 진실은 그녀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가족의 곳곳에 스며 있었다. 왜 죽은 자의 선물이 신생아라는 해석이 여전히 유효한 듯 표현되지는 의문이다. 죽은 자는 죽은 자이고, 새 생명은 새 생명일 뿐이다. 그렇게 믿고 싶은 사람들에겐 자기 위안으로 작용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음과 탄생이 이어지지 않는다. 이사벨은 자기도 외면한 세상 속에 사라졌고 남은 가족들은 수습하지 않은 채 자신들이 저지른 무게를 짊어지며 고통받고 있었다. 죽은 자가 여전히 자신들의 곁에 남아있다는 착각이 남은 이들을 지탱하고 있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었다. 적어도 이런 착각이 남은 자들을 겨우 살아남게 한다고. 그럴지도 모른다. 시간이 해결해주는 게 얼마나 될지 모르겠지만. 죽은 자에 대한 죄책감을 자신들에 대한 연민으로 등치시키는 것은 비겁하다.
아무도 괜찮지 않다. 영화와 현실에 대한 비극과 한탄들.
연애의 허상 - 영화와 사랑에 대한 비밀과 거짓말